[살며 생각하며] 자리의 의미 .. 노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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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두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한 아이는 업고, 또 한 아이는 부둥켜 안고 간신히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굉장히 힘들어 보여서 순간 내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자리가 많이 비어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두 아이 모두 어려보였고 젊은 엄마는 워낙 여윈데다 몹시 지친 모습
이었다.
무척 힘겨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마솥 더위라는 이 여름을 혼자 견디기에도 힘겨운데 어린 두 아이까지
거느렸으니..
버스는 자리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젊은 엄마는 한 아이를 자리에 앉히고 그 옆에 옹색스럽게
함께 앉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자리에 엄마와 두 아이가 함께 앉은 셈이 되었다. 버스는 거의
텅 비어 있었는데 굳이 한 자리만 차지하고 앉은 그 젊은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좁은 자리에 함께 앉은 옹색함 못지않은 소박하고 사려 깊은 다정함이 뒤에
앉은 나에게까지 번져오는 것만 같아서 혼자 조그맣게 웃었다.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아이를 업은 엄마나 나이 든 노인들이 타면 미련없이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버스나 전철을 탔을때 빈 자리가 있더라도 금방 앉지 않고 머뭇거리고,
앉아 있다가도 누군가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망설이지 않고
일어선다.
나는 아이가 하나고, 게다가 키가 나보다 훌쩍 큰 중학생이 되어서 일일이
내 손이 가지 않아도 되므로 이제는 내가 그 아이를 보살핀다기보다 오히려
믿고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더 많다.
듬직하고 흐뭇하지만 대신 아기자기한 재미는 없다.
가끔은 손을 잡고 다니기도 하지만 함께 다니는 일보다는 각자 행동하는
때가 더 잦다.
어쩌다 함께 버스나 전철을 타게 되면 나는 미리 이렇게 말한다.
"자리가 비면 엄마가 먼저 앉는다. 또 자리가 비어서 네가 앉게 되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자리를
양보한다"
아이가 조금 어렸을 때만 해도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가 비면 아이를 먼저
앉히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도 빈 자리에는 당연히 앞뒤 생각없이 제가 앉곤 했다.
어리니까, 그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아이를 먼저 앉히는게 버릇이
되어 있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함께 전철을 탔다가 아주 혼이 난 일이 있다.
아마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을 것이다.
밤이 늦은 시간이어서 전철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중간쯤에 우리 세 식구는 나란히 자리에 앉게 되었다.
셋 다 지쳐 있었고 전철이 지상을 달리는 구간이어서 밤이 깊어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호통 소리가 났다.
아저씨처럼 보이는 할아버지였는데, 취중인 것같았다.
늙은이한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도 그렇고 부모라는 사람들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아이의 아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와 나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음은 물론이다.
그순간 깨달은 것은 이제 더이상 우리 아이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어떤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던것 같다.
무조건 아끼고 보호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워낙 건장하신 분이라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저씨인줄 알았다고 변명처럼
내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자리가 비어 있어도 "너는 이제 서있어라. 의젓한 소년이니까"
하고 아이의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양보를 해야할때는 얼른 일어나 양보하라고.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함께 전철이나 버스를 탈때는 자리에 대한 약속을
꼭 지킨다.
자리가 비었을때 앉는 순서는 아이가 아닌 내가 먼저이다.
그리고 거침없이 양보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빈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굳이 한자리만을 차지하고 앉은 젊은 엄마의
모습이 새삼 나에게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자리란 바로 존재의 의미일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이어주는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옆사람에 대한 작지만 아름다운 관심과
따뜻한 배려가 아닐는지.
한 아이는 업고, 또 한 아이는 부둥켜 안고 간신히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굉장히 힘들어 보여서 순간 내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자리가 많이 비어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두 아이 모두 어려보였고 젊은 엄마는 워낙 여윈데다 몹시 지친 모습
이었다.
무척 힘겨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마솥 더위라는 이 여름을 혼자 견디기에도 힘겨운데 어린 두 아이까지
거느렸으니..
버스는 자리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젊은 엄마는 한 아이를 자리에 앉히고 그 옆에 옹색스럽게
함께 앉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자리에 엄마와 두 아이가 함께 앉은 셈이 되었다. 버스는 거의
텅 비어 있었는데 굳이 한 자리만 차지하고 앉은 그 젊은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좁은 자리에 함께 앉은 옹색함 못지않은 소박하고 사려 깊은 다정함이 뒤에
앉은 나에게까지 번져오는 것만 같아서 혼자 조그맣게 웃었다.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아이를 업은 엄마나 나이 든 노인들이 타면 미련없이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버스나 전철을 탔을때 빈 자리가 있더라도 금방 앉지 않고 머뭇거리고,
앉아 있다가도 누군가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망설이지 않고
일어선다.
나는 아이가 하나고, 게다가 키가 나보다 훌쩍 큰 중학생이 되어서 일일이
내 손이 가지 않아도 되므로 이제는 내가 그 아이를 보살핀다기보다 오히려
믿고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더 많다.
듬직하고 흐뭇하지만 대신 아기자기한 재미는 없다.
가끔은 손을 잡고 다니기도 하지만 함께 다니는 일보다는 각자 행동하는
때가 더 잦다.
어쩌다 함께 버스나 전철을 타게 되면 나는 미리 이렇게 말한다.
"자리가 비면 엄마가 먼저 앉는다. 또 자리가 비어서 네가 앉게 되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자리를
양보한다"
아이가 조금 어렸을 때만 해도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가 비면 아이를 먼저
앉히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도 빈 자리에는 당연히 앞뒤 생각없이 제가 앉곤 했다.
어리니까, 그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아이를 먼저 앉히는게 버릇이
되어 있던 어느날 우리 가족은 함께 전철을 탔다가 아주 혼이 난 일이 있다.
아마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을 것이다.
밤이 늦은 시간이어서 전철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중간쯤에 우리 세 식구는 나란히 자리에 앉게 되었다.
셋 다 지쳐 있었고 전철이 지상을 달리는 구간이어서 밤이 깊어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호통 소리가 났다.
아저씨처럼 보이는 할아버지였는데, 취중인 것같았다.
늙은이한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도 그렇고 부모라는 사람들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아이의 아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와 나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음은 물론이다.
그순간 깨달은 것은 이제 더이상 우리 아이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어떤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던것 같다.
무조건 아끼고 보호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워낙 건장하신 분이라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저씨인줄 알았다고 변명처럼
내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자리가 비어 있어도 "너는 이제 서있어라. 의젓한 소년이니까"
하고 아이의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양보를 해야할때는 얼른 일어나 양보하라고.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함께 전철이나 버스를 탈때는 자리에 대한 약속을
꼭 지킨다.
자리가 비었을때 앉는 순서는 아이가 아닌 내가 먼저이다.
그리고 거침없이 양보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빈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굳이 한자리만을 차지하고 앉은 젊은 엄마의
모습이 새삼 나에게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자리란 바로 존재의 의미일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이어주는 소중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옆사람에 대한 작지만 아름다운 관심과
따뜻한 배려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