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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1년전인 93년 8월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
*급재정 명령''이란 긴 이름으로 금융실명제는 단행됐다. 김영삼대통령이 *
*개혁중의 개혁''이라고 얘기했듯이 실명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가히 력명적인 조치였다. 해방이루 가장 *
*충격적인 경제초치주의 하나로 꼽히는 실명제-. 그러기에 그 탄생배경과 *
*과정등의 짧은 기간에 쌓여있는 긴 이야기들이 많다. 시간의 흐름속으로 *
*묻히기 전에 실무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다큐멘터리''로 엮어 *
*본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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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결단 ]]]

대통령이 청남대로 휴가를 떠난지 5박6일째가 되던 93년 8월5일. 과천정부
종합청사 1동 7층 동남쪽에 자리잡은 경제부총리방의 벽시계는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은 대통령께서 청와대로 돌아오셨을 텐데."석간신문을 대충 훑어본
이경식부총리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방안을 서성거린다. 바로 그때 전화벨
이 요란스레 울린다.

"네,이경식입니다"
"신문에선 또 경제가 엉망이라고 썼던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다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특별하게 우려할 건 없습니다"
"그 작업은 잘 돼갑니까"
"예"
"언제쯤 보고를 받을수 있습니까"
"월요일이면 되겠습니다. 9일날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완벽한 것을 보고하세요. 시간을 며칠 더 끈다고 좋은 게 나오는
것도 아닐바에야 말입니다"

그로부터 1주일후인 8월12일 저녁 7시45분.

전국의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국민들은 귀와 눈을 붙들어 맨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담화문을 읽어 내려가는 김영삼대통령의 목소리엔 힘과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텔레비젼 화면에 비친 대통령의얼굴은 꽤나 상기돼 있었고 순간
순간 비장한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명령"은 이렇게 밀실
에서 나와 만천하에 공개됐다.

대통령의 목소리에 넘쳐흐르는 힘과 자신감은 "드디어 우리가 실시한다"는
데 있었다.

"역대 정권에서는 금융실명제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고도
이를 실시하지 못했습니다"는 점을 담화문에서 유난히 강조한 것만 봐도
그렇다.

금융실명제의 뿌리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제5공화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82년 이철희 장영자 거액어음사기사건은 대형금융사건의 재발을 방지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기한다. 조세형평을 이룩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져
당시엔 볼수 없었던 "국론통일"을 이끌어낸다. 마침내 그해 9월 "금융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정치권은 이 법률의 시행을 이내 반대하고 나선
것.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이 간신히 아물고 있는 와중에 경제전반에 또
다시 혼란을 몰고와서는 안된다는게 반대이유였다. 결국 이 법률은 "86년
1월1일 이후에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실시한다"는 단서조항을 달고 국회
창고로 들어간다.

6공 노태우 전대통령이 87년 대통령선거때 내건 "실명제 실시 공약"도
헌신짝처럼 내버려진다. 이유는 전과동. "명분은 좋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라는.

역대 2개 정권이 시도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 혁명적 개혁. 김대통령으로선
이런 제도개혁을 단행한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웠을게 분명하다.

"김대통령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공약사업의 하나를
실천에 옮긴 겁니다. 더군다나 변화와 개혁을 내건 문민정부의 대통령이니
개혁중의 개혁이라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어찌 자랑스럽지 않았겠습니
까"(차동세 산업연구원장) 그렇다면 대통령의 얼굴은 왜 비장하게 보였는
가. 김대통령을 20여년간 보좌한 민자당 K의원의 풀이는 이러하다.

"김대통령은 다 알다시피 결단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결단에는 항상
고뇌와 격정이 따르는 법이고 그럴때 마다 대통령의 얼굴은 항상 비장하게
보였지요. 3당합당때도, 마산행때도, 광양제철소에서 박태준씨를 만났을때
도 그런 얼굴 표정이었지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도 부작용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는 걱정과 부담이 앞섰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역대 정권이
약속을 어길 정도로 실명제는 자칫 잘못하다간 경제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고,경우에 따라선 그렇게나 어렵사리 잡은 정권 자체가 흔들릴 만큼
위험한 "폭탄"이라는걸 대통령이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사실 김대통령은 취임후 2-3개월부터 "실명제"로 고뇌의 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실명제 주역 이경식전부총리의 말을 들어보자.

"실명제 실시 2달쯤전인 6월초 어느 날인가 대통령과 조찬을 하는 자리
였습니다. 각하는 불쑥 이런 말을 던집디다. "실명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해야한다는 사람도 많고,그걸 실시하면 나라경제가 망한다는 사람도 많은데
뭐가 맞는지.". 질문을 하려는 것인지,아니면 고민의 일단을 내비치고 있는
것인지 아뭏든 대통령은 그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말마따나 실명제,정확히 말하자면
"실명제 실시"를 놓고 당시의 여론은 분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대통령의 질문을 받은 주변 인사들의 대답도 그랬다. 경제부처에선
실명제의 주무부처라고 할수있는 홍재형 재무부장관부터가 "실시=당위"
주장을 펴면서도 조기 시행엔 다소 회의적이었다. 재무부의 자체 검토
시안도 자체가 빨라야 연말이나 94년 4월쯤 시행하는게 옳다고 돼있었다.
경기가 나아진 뒤에 실시해야 한다는게 논거였다.

경제에 관한한 대통령의 "입과 귀"인 박재윤경제수석의 생각도 "실명제
실시 유보"로 굳어있었다. 사정회오리속에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든 기업의
투자마인드등 경제상황이 수술을 하기엔 너무 허약하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대통령의 정책 구상에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사돈 김웅세 롯데월드 사장
(김대통령의 2남인 현철씨의 장인)도 박수석과 의견이 비슷했다.

그러나 소위 "가신그룹"과 이들이 대거 포진한 "정권인수팀"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통령 취임 초기 사정과 개핵프로그램을 내놓고 통치
구도를 짜가던 개혁주체들에겐 실명제야말로 언제라도 빼들수 있는 "정책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전병민 전정책수석등을 중심으로한 정권인수팀에선 정치적인 상황이
어려워질 것에 대비해 실명제카드가 필요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죠"
(민자당 S의원) 이렇게 보면 대통령이 각계인사로부터 들어 얻은 결론은
쉽게 유도된다. "하기는 해야겠는데 경제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때 김
대통령을 "조기실시"쪽으로 몰고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나온다.

다름아닌 이경식경제부총리였다. 그는 새정부가 출범한뒤 3월초 열린 경제
장관회의에서도 금융실명제의 조기실시를 주장할 정도로 "적극파"였다. 3공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정치적인 감"을 키운 덕에 그가"윗분"
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어냈다는 지적도 있다.

"대통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실명제 조기실시"를 생각했으나 경제분야
인사들이 경기부터 살려놓아야 된다고들 하는 바람에 머뭇거렸다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독 이경식부총리만 유독 찬성구를 던졌지요. 대통령 입장
에서 보면 경제총수의 찬성은 말하자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실명제작업을 진두지휘할 "팀장"을 찾아냈으니 얼마나 반가
왔겠습니까"(양수길교통개발연구원장.전부총리 자문관으로 실명제팀 기획
조정역)

김대통령과 이부총리의 "반가운 만남"은 6월 하순에 이루어진다. 일주일에
한번씩 갖는 대통령과의 독대날,그날이 바로 "8.12잉태일"이 될 줄은 정작
김대통령도 이부총리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채.

"아마 6월29일 이었을 겁니다. 그 전날이 제 환갑날이었으니까 날짜가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날은 대통령을 독대하는 날이었습니다.

대통령 독대는보통 1시간 가량 걸리는데 예상외로 빨리 끝났어요. 일찍
끝나는 것도 이상하고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실명제는 어떻게 하실거냐며
얘기를 꺼냈습니다. 대통령께선 그때까지도 완전하게 결정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기국회에 앞서 8월중 긴급명령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선 "나하고 생각이 똑 같다"면서 "바로 그거야"하시
더군요. 그리곤 이렇게 지시를내립디다. 긴급명령을 택해 실시할 준비를
서두르라고. 실명제작업은 그때부터 공식 카운트에 들어간 겁니다"(이경식
전부총리)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실시방법론이다.
"긴급명령"은 누구의 아이디어였고 왜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하는 점이다.
홍재형재무부장관이 들려주는 한토막의 일화는 그 의문을 푸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5월말 아니면 6월초라고 생각됩니다. 기록을 안해둬서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신문에서 하도 실명제에 관해 작문들을 해대길래
재무부 나름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께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앞으로 실명제를 할 경우 긴급명령이 좋지 않겠느냐고
떠보더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죠. "긴급명령은 실시전에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실시후에 논란 가능성이 크고, 법률에 의하면 법개정까지는
시끄럽겠지만 후유증은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벌떡 일어나 뒷자리에 놓아둔 두꺼운 법전을 들고
오셨습니다. 긴급명령조항을 읽어 주시면서 긴급명령이 더 좋다고 말씀
하시더군요"

날짜로 볼때 이는 김대통령 자신이 이부총리의 건의에 앞서 이미 긴급명령
이란 비상수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암시해 준다. 이부총리도 실명제
가 긴급명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김대통령과 나와의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이 긴급명령 아이디어의 장본인
이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김영삼대통령이 실명제 해법을 "긴급명령"이란 대담하고 모험적인 정면
돌파 방식을 고른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 1주년
백서"(재무부간)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실명제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실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긴급명령에 의한 실시가 불가피
했다. 긴급명령에 의한 실시는 무엇보다도 비실명에 의한 예금인출을 사전
에 예방할수 있어 대규모 자금이탈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예방할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판단하였다"

부작용의 최소화도 그렇지만 긴급명령을 택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법률
에의해 실시하려다간 실명제 자체가 또 다시 무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강했기 때문이다.

"실명제는 세번째의 도전이었습니다. 실패란 있을수 없었던 거죠. 만약
실패할 경우 너무나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수도
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허를 찌르는 기습에 있었습니다"

양수길 교통개발연구원장의 말은 과거 2번의 실패가 긴급명령이란 비상
수단을 쓰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실명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실시할수 없게시리 왜곡 돼왔다.
실명제는 우리사회의 모든 질곡을 바로잡을수 있는 "마이다스(희랍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그의 손이 닿으면 모든게 황금으로 바뀌었다고 함)의 손"
인양 과대포장돼 인식돼 왔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권이 정치적인 위기를
벗어나기위한 수단으로 실명제를 그렇게 악용해왔던 점도 적지않다.

그래서 말로는 한다고 했다가 정치적 위기를 넘기면 없었던 일로 접어
두었던 것이다. 국회의원등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실명제를 하자고 하면서도
속내는"떨더름"이었다. "긴급명령을 아이디어로 낸것만 봐도 대통령은 국회
운영에 도가 트고 정치적인 센스가 대단한 분이라고 할수 밖에 없어요"
(홍재형재무부장관)

"8.12"실명제 탄생은 대통령의 감과 특유의 결단에 기인한바 크다는 설명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