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을 우리네는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라고 형용한다. 그만큼
친숙한 담배가 이땅에 들어온것은 3백년쯤 밖엔 안된다. 그에 견주면 아직
부정적 연상부터 풍기는 선거역사 47년은 결코 짧다고만 할수없다.

처음 5.10선거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무슨 신기한 잔치라도 맞는듯
들뜨기도 했다. 낫놓고 기억자 모르는 문맹자들은 제가 찍을 후보의
작대기 숫자 안 틀리려고 열심이었다.

겪다보니 인간이 만든 제도가운데 이 선거만큼 말썽많은 것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부정선거 후유증으로 나라가 망할뻔했다.

그래서 역대 모든 정권,비록 총으로 빼앗은 정권마저도 공명선거 다짐은
잊지않았다. 그러나 단 한차례도 부정시비없이 넘어간 선거는 없었다.
그런데 지난주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명선거를 사상 처음 치뤄놓고도 자축분위기는 커녕 잘못된 부분만이
부각되어 초상집같았다. 3지역보선을 멀직이 앞두고 짜릿한 흥미거리는
한 야망가 부인의 출마여부와 당락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국민적 관심사는 14대국회의 최대업적이 될 새선거법이
과연 옥동자를 낳겠느냐였다. 솔직히 정계건 언론이건 성공쪽 보다는
부정의 음성화나 지나친 규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쪽으로 중심이
기울었다.

그런속에 주목받은 것은 대통령의 의지였다. 처음엔 공명선거 관철다짐이
여전한 말잔치냐, 아니면 진심이냐로 엇갈렸다.

그러나 과거 어느때 보다 야무진 의지가 누차 표명되었다. 후보자나
관계자들이 이번에 잘못하다간 당하겠구나 하고 감을 잡은게 분명해
보였다.

그 결과는 어떤가. 한마디로 만점 가까웠다. 그만하면 대성공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은 두가지로 집약할수 있다. 관권개입 여부와
금품 매수여부다.

그런데 이점에 여야가 한마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마도 이 나라
정치사에 그렇게 시원한 합의는 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당선자
정당 당수의 경사가 아니라 국가적 대경사여야 했다.

그런데 사회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고 인색했다. 만일 어번 보선에서도
선거부정이 여전했다고 가정하면 여론은 어찌 됐을까. 펄펄 끊었을게
틀림없다.

낮은 투표율 TK정서라고 표현된 지역감정, 여당의 실적부진이 모두 중요
하긴 해도 공명선거에 비한다면 순위가 낮다. 문제에는 경중이 있다.

이번 보선의 공명성 평가는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년부터 줄을 잇는 선거의 공명,진정한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또 만일 그냉담반응이 그 이상의 성과를 바라서였다면 한술에 배부르려는
지나친 욕심이다. 더구나 규제과잉 운운하며 선거법 재개정구실이나
찾는다면 이는 분명한 반민주적 흉계요 역사의 후퇴 획책이다.

투표율 저조의 탓은 상당부분 무더위가 덮어 쓰겠지만, 그보다는 현대
민주주의의가 표출하고 있는 징후군으로서 어디서나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선거를 흥청망청대는 잔치로,무엇이건 얻어먹지 않으면 허전하게
느끼게끔 순치돼온 이땅의 유권자로서는 금후의 선거 무관심화가 큰
문제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잔치아닌 다반사로의 선거인식 대전환이 요구되기
때문에 투표율의 제고에 각별한 연구가 딸아야 한다.

3지역전승 운운하던 여당이 간신히 영패를 면한 사실을 놓고 "거 봐라.
관권동원 안하고 이기는 여당 봤냐"는 식으로 나와도 큰일이다.

하지만 이번 여당의 부진은 선거제도의 공과중에 빼놀수 없는 과시병의
만연 탓으로 돌리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사람이란 자기자랑에 이골이 나다보면 자기도취가 되고,자기도취되다
보면 자신과잉에 빠져 만사를 얕보기 쉽다.

그런 뜻에선 이번 "3나누기 3"결과를 자만에 빠진 쪽에서는 반성,
의기소침한쪽에서는 분발촉구를 위한 황금배율이 라고 보면 어떨까.

선거 몇십번 치르는 동안 이 사회에서 겸손의 미덕은 아예 사라졌다.
어느새 그 자리엔 남녀노소 불문한 자기과시가 들어않아 행세하고 있다.
선거직을 비롯한 많은 공직자들의 오만이 테레비시청자의 눈총을 산다.
말로만 공복이라고 하지 백성위의 군림은 몸짓부터 표기 된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숙으리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줄 아는 빳빳한 자세가
대유행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경쟁력 제고가 국가적 과제인 만큼 상품
선전아래 긴요한 수단이다.

그렇기로서니 자지PR, 제자랑.잘났다"문화의 이리도 급격한 파급은 해도
너무하다. 선거 아니면 이 지경은 안될성싶다. 선거에선 사람이 상품이다.

여럿중에서 뽑혀 지리려면 내가 제일이요"하고 제자랑 하는수 밖엔 없을
것이나 맨땅에 엎려 큰절을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구걸이고 또 진정한
겸손이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이미 반세기 선거연륜을 쌓은 유권자 하나하나가 권력.매수.속임수
에 현혹되지 않고 기표소에서 양심대로 붓뚜껑을 찍고 말겠다는 결심여부에
달렸다.

무슨 묘방이 없을가. 그 하나로 이번 보선이 있던 8월2일 기리 새기게끔
무슨 날로 지정했으면 좋겠다.

하고많은 날이 있는데 또 무슨 날이 필요하냐고 눈흘길진 몰라도 공명선거
를 항구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굳이 반대할것도 없지 않은가.

인간의 건망중 아니면 변덕은 알아주어야 한다.

부정선거에 그렇게 진절머리나서 데모하고 처벌하고 법고치라고 아우성
치더니 이제 해내니까 별것 아니란듯 마지못해 몇마디 하고, 그것도 성이
안차 흠내기에 열심인 이 인심은 청개구리인기, 권력의 오만은 무섭다.

그러나 지적 고민도 못지않나 할말은 하자고들하나 탄압시대의 비판이야
말로 진정용기지만, 잘한 일에 강요없이 잘했다고 하는 것은 용기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8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