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의 역사는 오래됐다. 철인정치 성인정치 왕도정치, 모두 큰
수레바퀴를 누가 어떻게 돌려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러나
정치의 실제는 늘 이성보다 야성이 지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눈으로 보면 E H 카가 얘기한대로 역사는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이상의 실현을 신에게 의탁하려는 종교활동은 정교일치에까지
고양된적이 있지만 지금은 다시 교회안으로 들어와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모두 신학의 산물이다.
졸업논문에서 조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반항한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결국 마르크스는 너무 성급하게 신에게로 달려 가려다 좌절된
셈이 되었다.

우리에게 아직도 최고의 이상으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도 한때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완벽주의자에 의해 감당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비록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혁명을 대표하는 가장 순수한 인물로 복권
되기는 했지만 그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상대성 다원성 그리고 점진성을
오늘의 문명사회에 심어 놓았다고 볼수있다.

우리의 근세사에서도 도덕정치를 관철하려다 사사된 조광조의 행적은
두드러진다. 프랑스혁명때 문과에 급제한 민생정치의 선구자 정약용의
20년 유배생활도 대단히 자랑스럽다.

이나라에 서학이 들어와 사상 유례없는 순교자를 낸것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 천주를 모시고 제사를 폐하는 일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수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예부터 이 나라에는 충절이 많다 했던가.

18~19세기에 걸치는 시대는 세계 도처에서 오랜 압제를 풀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내거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단지 탄압의 가혹성 탓만이겠는가.

우리민족이 강렬한 이상미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학에 맞서
일어선 동학이 자연스럽게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내력이라든가, 반백년을
넘는 끈질긴 독립운동, 4.19, 전후30여년에 걸친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뿌리가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 독재가 심화시키고 있는 빈부격차를 운동의 기폭제로 삼기
위하여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활용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가 건설되는 길목에서 젊은 지성의 이상주의는 무엇으로
의연하게 남아 있아야 하는가.

국민이 새롭게 탄생하는 학생운동을 기대하면서도 한총련과 같은 개명된
학생운동의 발대식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구석구석 민주화할 일이 너무 많다. 또한 물량성장의 굉장성과
통계숫자의 허구성때문에 독재가 물러난 다음에도 독재의 유효성은 철저
하게 부정당하지 않고 있다.

당시를 누비던 인사들의 자리 보전이 용인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한국
발전이 세계의 모델"이라고 부러워들 하는데 무엇이 독재의 폐단이란
말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되묻는다. 몇몇 군인을 요직에서 몰아내고, 몇몇 인권
이 회복되고, 몇몇 민주투사들이 요직에 앉기 위하여 그 긴세월 그 많은
피와 땀을 흘렸단 말인가.

민주사회에서만 양성될 수 있는 자유와 창의 그리고 형평이 유린됨으로써
사회 발전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가를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한국병이란 세계인은 커녕 이렇게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은 또
정치적 목적으로 요란하게 부각되다가도 금방 오래되면 치유되는 만성병으로
여겨져서 속으로 멍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비록 사회주의와 출세주의라는 두날개를 단듯하지만 그원동력은
지고의 이상주의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학연대에 의하여 민주노조
를 성취하는데 기여한바 있지만 출세주의는 운동권 경력을 밑천으로 심지어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까지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순수한 운동세력
을 여지없이 실망시켰다.

독재타도의 전투구호가 독재가 뿌린 씨앗에는 범접도 못하면서 그 투쟁
경력만 전리품으로 남는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얼마전 어떤재벌 총수가 경영혁신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군사문화의 적자
유산을 실토한 적이 있다. 또 정부는 얼마전 우리경제의 가장 유망업종으로
되어있는 자동차에서 조차 그 수지사정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음을 밝힌바
있다.

또 어느 경제학자는 규격시장에 훨씬 미달하고 있는 우리시장을 자유롭고
공평한, 그리하여 규제와 특혜, 인플레가 없는 경쟁시장으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개탄했다.

공해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풍광이 명미하다는 금수강산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쓰레기를 치우는 심정으로 이런
문제를 향하여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허공을 가르는 주먹질 대신 머리를 싸매고 밤을 밝혀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