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세종대왕
과 이순신장군일 것이다. 굳이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이들이 문무겸전의 인물이라는 데 있다.

사람이 문쪽으로만 흐르면 심약해지기 쉽고 무쪽으로만 치우치면 난폭
해지기 쉽다는 의식이 사고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문무겸전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첫번째 덕목으로 꼽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민족이나 국가도 집권층이 문일색이거나 무일색일 수는 없지만
조선조는 사림정치가 시작되기 전인 15세기 중엽까지는 그 이후처럼
문신보다 상대적으로 무신이 등한시 되지는 않았다.

성종이 28세의 젊은 나이로 개혁을 위해 고심하며 수구세력과 싸우고
있던 때의 일이다.

나이가 든 권신들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다 못한 그는 뛰어난 인재를
나이나 경력에 관계없이 중직에 등용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당시는 이미 경상도 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받던 김종직이 도승지로 있던
때라 과거에 급제한 그의 제자들이 속속 조정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조정은
젊은 선비들이 장악하는 형세가 됐다.

젊은 선비를 기용하면서 성종은 문무겸전을 이상으로 삼아 그들에게
무관직도 주었고 변방의 무관을 조정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유사는 활을 가지고 달려가고 무사는 책을 끼고 조용히 서있다" 그무렵
이조정랑으로 있던 이복선의 상소를 보면 당시 선비들의 무관직에 대한
동경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성종의 개혁의지는 권신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사림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중종대에는 무신에 대한 대접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져 "오라고 부르면 오고 가라고 보내면 가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어 버린다.

난리나 나야 쓰이는 "가물때의 나막신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문무를
겸한 백성들의 지도자를 양성해 보려던 성종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나버린
셈이다.

15일은 세종대왕탄신 579돌이 되는 날이다. 시유에 따라 역사적 사실도
이리변했다 저리변했다 하고 정권에 따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한국역사상의 인물중 이런면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두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지켜보는 일도 퍽
흥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