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 한국경제신문사 상임고문 >

두툼해진 신문을 비롯해 책상머리에 쌓이는 인쇄물만 훑어보려해도
어지럽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토플러가
말하던 정보화시대, 제3의 물결이 어느새 턱밑에 차올라 숨이 가쁘다.
주어진 시간은 유한한데 쏟아져 나오는 정보, 해야할 일은 늘어만 간다.
중요한 것은 취사선택이다. 단념할것은 일찍 단념하고 한가지 일에 파고
들어야 남보다 앞선다. 이것이 시대적 요구다.

예순을 바라보는 벗들이 모여앉아 찧고 까분다. 평생 지켜봐도 저 친구는
예능에 탁월한데 어쩌다 터무니없는 과를 택해 평생 저고생을 하느냐, 처음
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고. 이내 과선택을 강요한 부모탓이다. 그 시절의
부모들에겐 걸기 어려운 기대였건만..

이제부터라도 좋으니 이 나라 부모들이 할일은 더도덜도 말고 자녀의
자질발견이어야 한다. 떡닢부터 반짝이는 소질을 집어내서 그걸 북돋우고
진학을 권해야 한다. 소질도 없는 자식의 입신양명만 윽박지르면 세상은
한도끝도 없이 지배하려는 자로 꽉 차 으르렁대고, 남을 도와 사회를 빛낼
일꾼은 메마르게 된다. 연극에서도 조연과 단역이 못지않게 소중하다. 11명
모두가 직접 골슛만 노리는 팀은 백전백패다. 어시스트를 영웅시해야
월드컵축구 우승도 바라본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견줘 개개인은 우수한데 몇명만 모이면 열세라는 비하
에 거부반응도 많았다. 그러나 최소한 저들이 저만한 경제대국이 된 기초의
하나가 가업을 잇고 개량하는 정신 전통이었음을 인정하는데 인색해선
안된다.

역대 집권자라면 사그리 욕을 퍼부어야 면피를 하는 세상이지만, 박정희
장군이 실질을 고취하여 후진경제의 "이륙"을 성공시킨 공로는 누가 뭐래도
길게 기억돼야 한다. 차라리 74년 문세광의 흉탄이 육여사에게로 빗나가지만
않았던들 이나라나 그 문중의 불운을 줄일수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아쉬움에 빠질때가 많다. 다만 모를 지나친 모방의 잇단 출현이라는 역사의
해학을 저승에서 그가 어떻게 소화할지 모를 일이다.

세계화는 현실로 성큼 뛰어오는데 이제야 통상전문가 국제전문가를 우대
한다고 서둘러댄다. 후발자의 이익을 누리던 역대정권의 단견이 기술축적과
전문가양성을 지연시켰다는 책임회피로는 실타래를 풀수 없다. 본질적인
접근이야 말로 늦을것 같아도 오히려 첩경이다.

본질은 어디 있는가. 조작적 유인에 있지않고 사회의 의식구조와 가치기준
에 있다. 수시의 필요에 따라 대우를 조율하는 임기응변은 그 약효가 짧다.
각자의 지위가 아니라 역할에 대해 사회가 진정한 명예와 보상을 제공하는
새시대의 가치기준이 긴요하다. 최고의 가치가 장자리 감투와 그것의
전리품으로 당연시되는 부정재에 계속 주어지는 한 이사회의 질적 향상은
제약적이다.

금배지와 관직이 최고의 선망이고 사자 사위감에게 열쇠꾸러미가 쥐어지는
한, 이 사회는 선진화는 커녕 알맹이 없는 외화내빈인채로 공전한다. 맡은
일을 천직으로 알고 한 우물을 파서 작으나마 보람있는 일을 성취해내는
일꾼들에게 진정한 명예와 보상이 돌아가는 사회라야 정의롭고 생산적인
사회라 할수 있다. (실은 그런 보배들이 지금도 구석구석에 숨어 있기에
이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지탱됨을 명심해야 한다) 명예는 명예로워야 한다.
양명이나 유명이 바로 명예로 간주되는 고식적 가치에서 탈피해야 한다.
직위는 위로만 올라가야지 아래로 가면 치욕이고 장자 직함 아니면 없신
여기는 이 사회의 고질을 치유하지 않고는 한국의 발전은 더이상 없다.

남북불문하고 이 민족은 사대에 빠져있다. 큰나라 섬기는 사대만이 아니다.
분에 넘치게 왕창 커야 직성이 풀리는 사대를 말한다. 또한 화려와 격식
체통에 매달린다. 외국의 역사유적을 많이 보고 그 호방한 스케일을 부러워
할만은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보다 상황이 문제다. 한말 무리한 경복궁의
복원이 망국의 일인이 된것은 흥선군이 왕실의 체통과 일신의 명망에 매달린
나머지 궁을 창건한 5백년전 보다도 더 기운 나라형편을 망각했기 때문이라
본다.

북한경제의 참상을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간단하다. 김부자의
예의 사대병이 주범이다. 34m나 되는 자신의 동상, 파리 개선문보다 훨씬
큰 내전개선문, 1백5층의 유경호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남포의 갑문등
기념비를 세우는데 알량한 국부를 쏟아부었다. 그도 모자라 세계적 군비에
재일교포 성금까지를 처넣고 있으니 그 기회비용은 엄청나다.

지난주말 연례적인 김의 생일기념행사는 끝없는 그들의 명예욕을 과시
했다. 아무리 신통력을 잠칭하지만 역시 하나의 인간일진대 그가 해온 일이
모두 무류일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명예가 아니다. 네로처럼 천추에
남을 오욕을 축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나가도 너무 내쳐 나갔다.
이제라도 미.일의 교차승인을 받을 양이면 유턴을 아주 크게 해야한다.

평양사람들이 세계인의 빈축을 사면 남이라고 초연할수 없다. 국제사회
에선 그냥 코리안이라 통칭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인간이라고
호소해 봐야 설득력이 약하다.

과연 남북에 공통성이 없는지를 마음비우고 자성해야 한다. 개통식에
쫓겨 시운전 대강대강한 남태령 전철같은 비근한 사례에서부터 청와대.
총리.장관을 왕궁.영상.판서로 자타공인하는 이 시대착오적 망상에서
깨어나지 않고서는 민주화도 전문화를 통한 경쟁력강화도 모두 공염불이
된다는 인과를 국민 모두가 깨달아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