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요청으로 전투기 국산화에 열중하고 있던 나는 1979년 7월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인사차 청와대로 다시
박정희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한진그룹이
제조업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전투기 생산을 맡긴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조업 경험이 많은들 수익성 보장이 안되는 전투기 제조사업을
누가 맡아서 그렇게 열심히 해낼 것이냐"고 격려하면서,80년대 중반까지는
전투기 생산이 가능할 것인가를 물었다. 나는 "앞으로 3년내에 출고시키
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이행하기 전인 그해 10월,박대통령은 유명을 달리했다.
"3년안에 전투기를 생산해내겠다"고 다짐한 나로서는 고 박대통령과의 약속
은 자연인과의 약속이 아닌 국가와의 약속이기에,그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
했다.

정부에서는 이미 78년 교통부가 관장하던 항공산업관련 업무를 상공부로
이관 시켰다. 항공공업진흥법도 국회에서 통과돼 법적인 뒷받침도 있었다.

1980년초 미국의 전투기 메이커인 노드롭사와 전투기 생산을 위해 우리측의
숙련된 기술자들을 노드롭 공장에 파견하여 집중적인 기술훈련을 실시한다는
데 합의했다. 생산설비의 확보와 소요 공장의 완공,인력 양성등 많은 노력을
퍼부었다.

마침내 82년9월 이미 고인이 된 박대통령과의 약속대로 전투기를 출고
하기에 이르렀다. 공군에 인도된 제공호는 미국노드롭사의 F5기모델을
기초로 한 고성능 초음속 전투기로 북한 공군의 주력기인 미그21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기종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기술 축적은 하지않고 조립생산만 한다는 식의 별별모략도
다 있었다. 정비에서 면허 생산 단계로 이어지고 부품의 국산화및 공동개발
단계를 거쳐 자체 설계생산으로 발전해가는 항공산업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
들의 얘기였다. 그러나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선전을 잘하는
것이 곧 사업 자체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누구든 원한다면 와서 시설과 능력을 둘러보라고 주변사람들에게
권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특히 방위산업체
로서의 의무인지라 "묵묵히 만들어 내는것"만을 기본철학으로 삼았다.
"누구든지 의심이 난다면 와서 보라"며 일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제공호 생산에 즈음하여 항공산업이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서서히 국내
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대한항공과 전문계열화를 이룬 기존부품업체들
외에도 여러 대기업들이 진출하는 계기도 되었다.

제공호 생산에 뒤이어 1984 미국의 휴즈사와 1억여달러에 달하는 헬기
수출계약을 체결하였다. 국내 항공기 제조산업의 산실로 발돋움하기 위해
B747 점보기2대가 동시에 입고해 기체 중정비등을 받을수 있는 2기의 대형
격납고 시설을 비롯하여 전자공장 보기공장 종합기자재 창고등도 착착 건립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모두 우리나라 항공산업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2년후에는
세계최대의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사및 어어버스사 등과 3억달러가 넘는
중대형항공기부품 수출계약을 체결할 만큼 발전했다.

우리나라 항공산업수출의 첫장을 연 것이었다. 수주범위는 더욱 확대되어
미국 더글라스사와 MD-11 날개부품 독점계약을 체결하였다. 차세대 항공기
로 손꼽히는 보잉 B737-X시리즈 여객기 공동개발에도 합의하였다. 또한
B777 항공기개발에는 초기단계인 설계부터 참여하여 일부 공동설계등 첨단
항공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이렇게 전투기 생산과 항공기부품 제조를 통하여 항공기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쌓아갔다. 85년말에는 국내 최초로 초경량 항공기 개발에 착수하여
순수 우리 힘만으로 훈련용 경비행기 "창공 1,2호"를 생산해냈다.

또한 87년 업계의 협조와 동참을 위해 한국 항공우주연구조합을 설립하여
독자모델의 항공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에따라 탄생한 "창공-91호"는
91년 시험비행에 성공하고 교통부에서 형식증명도 획득했는데 국산 자가용
비행기시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