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시 청와대에 근무할때다. 상공부의 담당국장인 오태환 중공업국장
(한양화학사장,현한국종합기계회장)을 불렀다. "걸프와의 수송계약에는
한국국적선을 쓰게되어 있으니 이 조항을 활용하면 걸프에 차터할수 있을
것이오. 6개월전에만 통고하면 강제집행할수 있게 해놓았으니 걸프에다
차터하도록 하시오"하고 걸프와의 수송계약내용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오국장은 "사실 요즘 국회에서 이문제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울산앞바다에
거대한 배가 세척이나 둥둥 떠있으니 울산출신 국회의원이 걸핏하면 질문을
합니다. 장.차관도 골치아퍼서 아예 저에게 답변시킵니다
(국회에서는 국장이 답변할수 없으나 이 문제만큼은 양해했다).

사실 뾰족한 답변도 못하고 고민이 많았는데 잘 됐습니다"라고 기뻐했다.
그뒤 걸프에 한국국적선을 갖고 석유공사의 원유를 수송하겠다는 통고를
했다. 75년9월18일이다. 그후 6개월이 지나 또다시 공문을 띄웠다.

오국장이 계약조문대로 시행한 것이다.

걸프측에서는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곧 걸프소유의 배로
수송하던 원유를 현대에서 만든 배로 수송하게 되었다. 팔곳 없던 배3척
모두가 가동하게된 것이다. 그 배이름은 코리아 선(76년8월 차터) 코리아
스타(11월) 코리아 배너(12월)다. 현대조선은 큰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현대는 서둘러 아세아상선이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걸프와의 용선만료
기일은 80년6월30일,약4년간으로 현대는 이기간중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나(필자)는 걸프와 수송계약을 수정할당시 우리나라 조선공업을 위해
"한국이 유조선을 보유할때 한국국적선으로 수송하는 권리를 갖는다. 6개월
전에만 통고하면 걸프에 손해가 없다고 본다"라는 조항을 삽입했던 것이
이처럼 유효하게 활용된데대해 심히 기뻤던 생각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진다.
물론 걸프측의 적극적인 협조로 가능했다고 본다. 26만t급 3척의 용선이란
당시 전세계의 해운업계 불황을 고려할때 대단한 용단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알고 있다.

현대는 리바노스씨가 갖은 핑계를 대며 인수를 거부했던 7302호에 대한
국제재판에서도 승소했다. 이때는 이미 걸프측과 용선계약을 끝낸후여서
리바노스씨측에 배를 팔지 않아도 되었다. 선주가 일방적으로 찾아간
계약금만 되받아내면 되었는데 현대는 배 한척을 더 발주받기로 하고
타협했다고 한다.

흔히들 조선소를 대규모의 철공장으로 비유한다. 배의 크기가 커질수록
조선공장도 대형공작기계시설을 갖추어 가고 이에따라 조선소에서는 부업
으로 화학공장에서 쓰이는 각종장치를 제작하게 된다. 조선소가 다각경영을
하게되는 이유다.

나는 62년 일본의 미쓰이(삼정)조선소에서 5만t짜리 유조선을 건조하고
있는것을 보고 그 크기에 놀란적이 있다. 5만t의 배를 생전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화학과장 시절이어서 조선공업을 시찰하러 간것은 아니
었다. 그 조선소에서 정유공장건설에 필요한 장치,즉 조선소에서 부업으로
하고있는 화학기계부의 작업장을 보러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이후 느낀점이지만 우리나라는 외국의 예와는 정반대로 화학공장
건설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을 시작했다. 조선소의 작업량(수출선)도 정유
공장에서 필요한 원유수송선을 만드는데서 얻어졌다. 세계에서 처음있는 일
일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걸프사와의 원유 수송 수정 계약에서
<>걸프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원유수송을 <>우리나라 국적선으로 쓸수도록
조항을 만들었고 <>국내에서 건조한 배를 쓰도록 한데서 비롯됐다고 볼수
있다.

수정계약으로 20만~30만 짜리 배를 만들수 있는 수요가 생긴다고 보았고
실제 그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현대조선소에서 만든 팔곳없던 3척의 초대형유조선도 구제할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한국에서 만든 배를 우리해운업계가 구입,우리나라
정유공장에서 쓰는 원유를 수송하게 되었던것이다.

물론 모든일이 뜻대로 된것은 아니었다. 걸프와의 수송계약을 수정해서
한국국적선을 쓸수있는 길을 터놓자 갑자기 해운업자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나타났다.

이 해운업자들은 대형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외국에서 큰 유조선을
연불로 마구 구입,국내 정유회사의 기름수송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국내 조선소에서 만들려고 하는 작업량을 마구 뺏는 결과가 된것이다.

어느날 삼화운조라는 회사가 생겨나더니 23만t짜리 초대형 유조선
(천우호)을 외국에서 사다가 걸프와 차터를 했다. 73년7월이다.

범양상선도 32만t급 초대형 유조선(오션팍)을 사서 74년8월부터 걸프의
원유를 수송하기 시작했고 그해 10월부터는 호남정유가 18만t 짜리(호남펄)
를 구입,운항에 들어갔다.호남정유는 호남탱커라는 회사도 설립했다.

경인에너지(주)도 성운물산이라는 해운회사를 설립,유조선을 외국에서
사들였다. 현대그룹도 아세아상선이란 해운회사를 설립했지만 이회사만은
현대에서 건조한 유조선을 운영하는 해운회사였다.

해운사업은 교통부소관으로 상공부로서는 어떻게 해볼수가 없었다. 해운
회사들이 생겨난 것도 설립된 후에야 알게 되는 판이었다. 대형유조선회사
5개사가 잇달아 생겨났다.

그결과 우리나라 국적선은 3백12만t으로 늘어나 해운국이 됐다. 상공부는
조선공업을 육성하려다가 해운국을 만든 꼴이 되었다.

이들 해운회사 소속 유조선중 국내에서 건조한 배는 아세아상선 소속의
코리아선 코리아스타 코리아배너 3척(80만t)뿐이다. 아세아상선조차도
동해1호와 동해2호는 중고선을 도입했다. 선박 총보유 3백12만t 중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한 비율은 25.6%에 그쳤던 것이다. 각 정유회사의 원유운송
계약을 보면 아세아상선의 경우 석유공사와 용선계약을 맺고,80만2천t의
배로 수송했다. 별도로 걸프에서 원유를 직접 수송하기도 했다.

국적선(한국국기를 단 배)이 담당하는 비율은 76년에 7%,77년 50%,78년
42.3%였다.

호남정유는 호남탱커(주) 소속으로 83만8천t의 유조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국내에서 건조한 배는 한척도 없었다.

호남탱커는 75년 26%,76년 58%,77년에는 73%의 원유수송을 담당하였다.
경인에너지는 성운물산과 장기계약을 맺고 7만5천t급의 유조선을 구입,운항
했다.

우리나라 국적선의 비율은 75년에 8.7%였던 것이 76년 23%,77년 55%로
급격히 늘어난다.

이는 우리나라가 해운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정유공장이 큰 몫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해운과 조선공업을 접목시키는데에는 역부족
이었다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