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의 육해공 종합수송체제 가운데에서 "바다의 길"을 맡고있는
기업이 한진해운이다. 3남 수호가 17년동안 실무를 익히고 경영수업을
받다가 올해부터 사장을 맡고있다.

내가 바다에 애착을 갖게된것은 청년시절 일본 중국을 비롯 동남아지역을
두루 항해하면서 "해운왕"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진상사 시절에도 화물수송용 운반선이 있긴 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바다에 길을 내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처음 만든 기업은 대진해운이다.

한진이 월남에서 한창 활약하던 67년 1만2천t급 노르웨이 화물선 한척을
사들여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했다.

이무렵 나는 컨테이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66년 월남 퀴논항에서
철도의 기관차만한 큰 궤짝을 잔뜩 실은 미국 화물선 한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본뒤부터였다. 이러한 광경은 내가 젊은시절 배를 타고 동남아를
항해하면서도 본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게가 무려 40t이나 되는 큰 컨테이너 상자들을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특수 크레인이 2분에 한개씩 척척 부두위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열두사람이 달라 붙어서 한시간동안 열심히 작업을 해야 겨우 그만한
화물을 하역할 수 있을 때였다.

나는 이 하역작업을 두시간이상 지켜보면서 이것이 "해상운송의 혁명
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게 커다란 자극이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종합수송업을 목표로 하던 나로서는 그냥 놀라고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대진해운을 설립하면서 사들였던 "오대호"한척을 미국 서부항로에 투입해
운항하다가 72년 3천5백 급 컨테이너선 2척을 일본에 발주했다. 그중
하나를 "인왕 제1호"로 명명하고 부산~고베간 항로에 운항시켰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해운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 운항이었다.

아울러 인천항 제4부두에 건설중이던 컨테이너전용 부두를 서둘러 74년
여름에 완공시켰다. 대한항공을 인수하는 바람에 착공후 건설이 지연됐다.

당시 대진해운은 고베 등지에 취항하면서 일본의 최대 선박회사인 일본
우선회사와 총대리점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인천의 한진부두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수출되는 화물 컨테이너를 "인왕호"로 고베에 실어내면,거기에서
일본 우선회사가 받아 미주로 실어나르곤 했다.

그러던중 미국의 총대리점 계약 관계에 있던 시랜드사에서 나에게 양자
택일을 요구해 왔다.

일본우선과 시랜드 총대리점 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당장은 일본우선과의 유대가 있어야만 "인왕호"를 운항해 나아갈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먼 장래를 생각하면 시랜드와의 관계를 더 다져야 할
판이었다. 진퇴양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불가피할 경우 체념이나 결론은 빨라야 했다. 나로서는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우선과의 결별을 선언하자 일본
우선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로서는 창업 1백년 이래 처음으로 당하는
수모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후 대진해운은 원양어업에도 진출했다. 73년 스페인에서 원양트롤선 6척
을 도입하여 인도네시아 근해와 라스팔마스등 대서양에서 조업했다. 그러나
수산업은 역시 운송업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다 내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인수 초창기 대한항공의 업무에 전념하느라 직접 챙기지 못하고
남한테 맡기다시피 한 사업이 잘 될리가 없었다. 내가 손을 댄 사업중에서
고전을 겪었던 일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래서 결국 대진해운은 해체키로 하고 수산업이 아니라 해상 운송만을
전문으로 하는 한진해운을 77년5월에 설립하게 되었다. 그대로 물러나기
에는 너무도 바다에 대한 미련이 남아 다시 한번 바다에서 승부를 걸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