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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전략군단사] (202) 오원철 <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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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 건설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필요하다.

    우선 막대한 소재(특히 각종강판과 형강)를 저장하는 장소와 이들 소재를
    자르고 용접해서 배의 각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 이공장에서는
    될수록 큰 부품으로 만들어야 조선소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종전에는
    이런 작업을 모두 도크안에서 했기 때문에 도크에서 걸리는 시간이 많이
    소요돼 생산성이 나빴다.

    도크에서는 BLOC라고 하는 큰 부품을 탑재만 하면 선체가 되고 배 모양이
    만들어지면 진수를 하게된다. 배가 물에 뜨게되면 도크밖으로 끌어내어
    안벽에 붙들어 매고 의장작업을 해 배의 건조를 끝내게되므로 조선소는
    이러한 모든 시설들을 확보해야 한다.

    현대 울산조선소는 조선소를 건설하는데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도크
    의 규모를 길이 5백m너비 80m깊이 12.7m로 계획했다. 웬만한 국민학교
    운동장 5개정도의 크기이며 깊이 12.7m는 해수면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만약 도크를 만들 곳이 육지라면 이 육지를 모두 해면높이로 깎아서 평면
    으로 만든다음 12.7m를 더 파고 내려가야 한다. 엄청난 흙을 파내야 한다.
    큰 저수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한번은 박대통령이 조선소 건설현장 시찰에 나섰다. 정회장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깊이 30m나 되는 큰 계곡밑에서 각종 중장비 수십대가
    바위를 깨고 흙을 나르고 있는 곳으로 갔다.

    도크는 보이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어디가 도크 만드는 곳이냐"라고
    물었다. 정회장이 "각하가 서 계시는 곳이 바로 도크 밑바닥입니다"라고
    대답, 모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72년7월에는 장마가 왔다. 빗물은 도크를 만들려고 파놓은 구덩이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물의 높이가 사람 키만큼 괴었다. 이 물을 빼지
    않고는 작업할 수 없어 모든 대형 양수기를 동원했는데 3일 밤낮을
    퍼내야 했다고 한다.

    공장건물은 약4만평. 이 공장건설이 어느정도 마무리 됨에따라 73년 3월
    20일부터 1호선 건조작업에 착수했다. 계약상 74년 7월까지는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도크의 기초공사는 끝난단계였다. 배를 처음
    만드는 것이었던만큼 애로가 많았고 시행착오도 적지않았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처음 건조하는 대형유조선이라 사기는 충천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선업계에서는 우리가 26만t의 대형 유조선을 만든다고 하니까
    몇가지 우려를 했다고 한다. "첫째는 현대건설이 건설 공사는 많이 했다고
    하나 조선소 건설은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현대가 조선소를 건설한다
    해도 배를 건조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는 선체를 만들어도 선박의장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중에는
    "26만t의 배길이는 3백40m로 배를 다 만들어놓고 바다에 띄우면 온도차에
    의해서 1m정도 휠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배가 똑바로 가지 않는다"라든가
    "현대에서 만든배가 제대로 성능을 낼까,항해 도중에 사고가 나지 않을까"
    등 많은 우려를 했다.

    이런 말들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필자의 귀에까지 들어와 일말의 불안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던 모든 종업원
    들은 오기가 발동,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한예로 제2호선에 장착한 보일러가 폭발,이안에 들어간 파이프패널을 전면
    교체해야 하는 대사고가 있었다. 런던지사는 추가구입을 지시받아 주문을
    했으나 공장측은 이 기자재를 생산해 내는데 8주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8주나 걸렸다가는 납기내에 배를 완공해 내기가 불가능했다. 구매팀은
    보일러 공장의 작업현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제작책임자를 만나 통사정
    하고 따로 선물공세를 펴서 작업기간을 2주일 앞당길수 있었다. 이 부품은
    대기하고 있던 트레일러에 실어 막바로 도버해협을 건넜고 파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행기에 실렸다. 입체공수작전으로 부품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1호선은 74년2월15일 새벽1시께 진수식이 치러졌다. 길이 3백45m 폭52m
    높이 27m로 배라기보다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해수주입 밸브가 열리고 물이
    가득차자 배는 떠 오르고 이어 도크문을 연다음 예인선에 끌려 도크밖으로
    움직여 나갔다. 우리 조선공업이 국제화되는 진수식이기도 했다.

    진수직후에는 4개월간 안벽에서 기계별로 시험을 끝내고 6월28일 1호선
    명명식을 거행했다. (2호선도 함께) 이날 오전11시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명명식장에는 박정희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정부요인,국내외 외교사절,선주
    리바노스씨와 수행원, 정주영회장 및 본사 임직원 가족, 울산시민등이 참석
    했다.

    박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오늘과 같은 업적을 이룩한 현대조선 전사원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한뒤 "1,2호선의 명명식은 중화학공업 발전의 새로운
    기틀이며 전진하는 국력의 상징"이라고 감회를 피력했다.

    곧이어 영부인 육영수여사는 1호선을 애틀랜틱배런(Atlantic Baron:대서양
    의 남작)으로 명명, 이 배가 오대양을 누비며 세계 인류에 크게 기여하라고
    송축했다. 2호선은 용선회사인 영국 쉘 석유회사 맥파젠 회장의 영애에
    의해 애틀랜틱 배러니스(Atlantic Baroness:대서양의 남작부인)로 명명
    됐다. 하늘에는 비둘기가 날고,수없이 많은 풍선이 떠올랐다. 뱃고동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식이 끝난뒤 박대통령내외는 정회장의 안내로 애틀랜틱
    배런호에 시승, 선실안을 둘러보고 뱃고동을 직접 울려보기도 했다.

    배가 완성되기까지 다섯차례나 사양을 바꾸는등 갖가지 어려움을 안겨
    주었던 선주 리바노스씨도 정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배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배입니다"라며 만족해했다.
    배를 감정하는데 까다롭기로 소문난 리바노스씨의 이같은 평가는 현대
    조선의 건조기술이 이미 세계수준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말이며 우리
    조선공업이 세계에 약진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현장에서 "조선입국"이라는 휘호를 썼다. 이 휘호는 돌에
    새겨져 지금도 현대중공업 현관앞에 세워져 있다. 명명식은 끝났지만
    시련까지 끝난것은 아니었다.

    이후 3개월간 기계별로 정밀점검을 한뒤 10월5일에는 배의 속도 및 조종
    성능, 전체적인 컨트롤시스템을 점검하기 위한 마지막 해상 시운전에 들어
    갔다. 이 시운전만 끝나면 10월15일 인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운전에 들어가자 기관실과 갑판위의 거의 모든 기기들에서 이상이 나타
    났다. 경험과 지식부족에서 비롯된 사고가 대부분이었다. 주기관인 메인
    스팀라인의 이상을 고치는데 37일이 걸렸다.

    인도일정이 늦춰지자 선주는 말할것도 없고, 정부기관 언론등이 과연
    이배가 움직일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임직원 모두가 달라붙어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당시 배에 한번
    이라도 오르지 않은 사원이 없었고 한번 배에 오르면 몇주일씩 배안에서
    생활했다.

    이런 고생끝에 마침내 74년11월27일 오후 현대의 백충기이사와 선주대표
    존 볼라보기라키스씨는 인도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상호 확인절차를 거쳐
    11월28일 새벽2시30분 공해상에서 애틀랜틱 배런호를 인도했다. 배런호는
    곧 수평선 저너머로 사라져갔다.

    이 소식은 청와대로 바로 보고되었고 이 보고를 받은 김정 실장은 즉시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대통령이 몹시 기뻐했다고 전해졌다. 나는 마음
    속으로 "조선입국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한국에서 건조한 배가 무사
    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현대조선,특히 정주영회장은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을 국제수준화 하는데
    공이 크다.

    분명 그업적과 증언은 조선공업사에 기록,역사에 남아야 한다. 여기서
    정회장이 조선소건설당시를 회상하는 글 하나를 소개한다(77년11월23일
    민간개발원주최 강연회).

    "울산조선소는 도크를 파내는 것도 그렇고 배를 짓는 것도 그렇고,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영국 프랑스 서독 스페인 4개국과의 차관도입
    협정을 마치고 72년3월22일 조선소 도크를 파기 시작해서 2년3개월만에
    조선소를 준공했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리바노스씨에게서 주문받은 배
    2척을 건조하면서 방파제를 쌓고,바다를 준설하고,안벽을 만들고,도크를
    파고,14만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근로자 5천명이 살수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최대 선박 건조능력 70만t,부지 60만평,70만t급 드라이도크
    2기를 갖춘 국제규모의 조선소를 우리는 2년남짓만에 건설한 것입니다"

    (주:공기단축에 있어 세계기록을 수립했다. 토목.건축업계에는 "한국식
    돌관공사"라는 것이 성행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때부터 생겨났다.
    사장이하 전 직원이 현장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밤낮을 가리지않고 밀어
    붙이는 작업, 좀 시행착오의 위험성이 뒤따라도 해치우는 작업으로 전쟁터
    에서나 가능한 작업방법이 정착된것이다. 후에 중동공사에서 이같은 작업이
    빛을 보게된다. 현대의 정회장도 돌관공사를 지휘,가장 짧은 시간내에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건설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회장은 이에 만족치 않고 확장에 확장을 거듭,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한다.

    "우리는 1차공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확장공사를 시작해 75년에 최대선
    건조능력 1백만t, 부지 1백50만평, 드라이도크3개, 연간 건조능력 2백40만t
    의 조선소를 준공,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하였습니다. 저는
    조선소를 이렇게 세계에서 유례없이 빨리 지을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5천년
    문화민족의 저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조선소를 지으면서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것은 잴수 없는 힘을
    갖고있고 모든 일은 그정신력이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2천명이 일체감을 가지고 거의 3백65일 돌관작업을 하면서 조선소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대부분의 임직원이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저기 웅덩이에
    고인 물로 대강 얼굴을 문지르고 일터로 나가 밤 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못풀고 잠자리에 들곤했습니다. 그것을 하루 이틀이
    아니고 1년 내내 계속했습니다. 저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서울에 있다가 울산에 내려갈 때는 새벽4시께 차를 타고 갑니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남대문을 지나가노라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받아가지고,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길을 건너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들을 보면서 한없는 존경심과 유대감을 느끼며 무한한 힘을 얻곤
    했습니다. 확실히 울산조선소를 건설하던 때가 내 인생중에서 가장 활기에
    차 있었던것 같습니다"

    나는 이 강연요지의 글에서 정회장의 사업성 성품 지휘력을 알것 같아 큰
    감명을 받았다. 특유의 돌파력에 감탄을 하며 그의 내면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공업에 대한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며 앞을 내다보는
    판단은 무서우리만큼 정확했다. 그 증거로 대형선박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수지가 맞는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졌었다는 점이다.

    정회장은 조선사업 초창기때부터 현장 근로자에 대한 찬사의 말을 자주
    하면서 후한 임금을 주었다. 박대통령에게도 "근로자에 대해 봉급을 올려
    주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인건비를 더 주어도 수지가 맞는다
    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더욱이 중동건설에 나선 후부터는 한층더
    근로자들을 우대하려고 애썼다.

    두번째로는 조선공업에 대해 앞으로의 전망을 크게 낙관했다는 점이다.
    현대조선(주)에는 조선소 건설 중에도 신조선 주문이 이어졌다. 71년말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씨에게서 2척의 대형유조선(VLCC)을 수주한데 이어
    조선소 건설이 한창이던 73년에는 23만t급 4척,26만t급 4척 등 전부 8척의
    VLCC를 수주했다. 또 오일쇼크로 세계 조선경기가 크게 위축된 74년 3월
    에도 26만t급 VLCC 2척을 추가로 따냈다. 74년6월 조선소가 준공되기도
    전에 전부 12척의 VLCC를 수주했던 것이다. 이 12척의 전체 적재량은 3백만
    DWT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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