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42) 조중훈 한진그룹회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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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공은 남이 만들어준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며 무사안일하게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아니다.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거나 남다른 신념으로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가치있는 일을 창조하면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인 것이다. 내가 서른살이 되던 해 발발한 6.25 동난은
우리 한민족 모두에게 주어닌 가혹한 시련이었다.
내가 인천으로 돌아온 것은 어느 정도 전쟁이 교착 상태에 들어간 1943년
봄이었다. 부산 피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찾은 꿈과 삶의 터전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화했다. 인천 시가지가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과 함께 증발된 차량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동안 내가 애써 이룩한
한진상사의 시설 일절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후일의 재기를 위하여 손이
타지 않도록 깊이 보관해 두었던 정비 기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부채뿐이었다. 피난때 몰고
갔던 트럭 한대마저 부산에서 처분했던 터였다. 그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
면서 폐허위에 가건물을 세웠다. 한진상사 간판을 다시 내걸고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젊음과 투지,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창기부터 굳건히 다져 놓았던 신용만이
나의 재기를 밑밭침해주는 전부일수 밖에 없었다. 사업자금의 융통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전쟁전의 신용을 인정받아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수 있었다.
옛 단골들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인천바닥에 꾸준하게 쌓아온 신용이 있었기에 한진상사는 완전히 재기의
터를 굳히고 휴전2년 뒤쯤에는 거의 6.25동난 직전의 사세를 회복했다.
이무렵 경인지역에는 한진상사와 엇비슷한 규모의 운수업체가 약50개정도
난립해 있었다. 특히 인천에는 전후 복구물자 하역으로 상당히 흥천대천
분위기였다.
기회는 이럴때 있는 법이라는 육감이랄까 예감같은 것이 왔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들보다 한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천항으로 반입해 미군들이 사방으로 운반하는 보급물자수송에 관심이 간
것이다. 군인들이 직접 수송하는 군수 물자를 겨우 트럭 몇대 보유한 한국
수송업체가 맡겠다는 발상을 하다니 언감생심,누군가 그런 아이디어를 들었
으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군들은 한국업체의 수송능력은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인
자체를 신용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인천 부두에서는 군수품도난사건이
가끔 발생했고 심지어는 달리는 트럭에까지 뛰어 올라 물건을 탈취해 달아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난이 죄였고 오랜 전쟁이 사람의 심성까지 흉흉하게 만들어 놓은
탓이리라. 그러니 미군의 입장에서는 한 트럭에 몇 만불씩이나 하는
군수품의 수송을 선뜻 맡길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불신으로 인해 일반업자들이 미군물자의 수송을 맡는다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할뿐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누가 가져다 주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법. 미군이
직접 납품업체로부터 수송하던 캔 맥주를 시험적으로 대리수송해볼 기회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용역 형태의 계약이 아니라,한 납품업체에서 특정부대
까지 수송하는 잠정계약에 불과했지만,차량에 대한 사전검사와 운전기사에
대한 신원보증까지 거친 뒤에야 부대출입증을 발급받을수 있었다.
어쨌든 우선은 미군부대에 출입이나마 해볼수 있는 길이 터진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은 일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계약이었다. 어디서 저절로 떨어진 행운이 아니라,집념과
노력을 쏟아 내가 스스로 찾아서 만들어낸 기회였던 것이다.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아니다.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거나 남다른 신념으로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가치있는 일을 창조하면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인 것이다. 내가 서른살이 되던 해 발발한 6.25 동난은
우리 한민족 모두에게 주어닌 가혹한 시련이었다.
내가 인천으로 돌아온 것은 어느 정도 전쟁이 교착 상태에 들어간 1943년
봄이었다. 부산 피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찾은 꿈과 삶의 터전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화했다. 인천 시가지가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과 함께 증발된 차량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동안 내가 애써 이룩한
한진상사의 시설 일절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후일의 재기를 위하여 손이
타지 않도록 깊이 보관해 두었던 정비 기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부채뿐이었다. 피난때 몰고
갔던 트럭 한대마저 부산에서 처분했던 터였다. 그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
면서 폐허위에 가건물을 세웠다. 한진상사 간판을 다시 내걸고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젊음과 투지,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창기부터 굳건히 다져 놓았던 신용만이
나의 재기를 밑밭침해주는 전부일수 밖에 없었다. 사업자금의 융통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전쟁전의 신용을 인정받아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수 있었다.
옛 단골들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인천바닥에 꾸준하게 쌓아온 신용이 있었기에 한진상사는 완전히 재기의
터를 굳히고 휴전2년 뒤쯤에는 거의 6.25동난 직전의 사세를 회복했다.
이무렵 경인지역에는 한진상사와 엇비슷한 규모의 운수업체가 약50개정도
난립해 있었다. 특히 인천에는 전후 복구물자 하역으로 상당히 흥천대천
분위기였다.
기회는 이럴때 있는 법이라는 육감이랄까 예감같은 것이 왔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들보다 한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천항으로 반입해 미군들이 사방으로 운반하는 보급물자수송에 관심이 간
것이다. 군인들이 직접 수송하는 군수 물자를 겨우 트럭 몇대 보유한 한국
수송업체가 맡겠다는 발상을 하다니 언감생심,누군가 그런 아이디어를 들었
으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군들은 한국업체의 수송능력은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인
자체를 신용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인천 부두에서는 군수품도난사건이
가끔 발생했고 심지어는 달리는 트럭에까지 뛰어 올라 물건을 탈취해 달아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난이 죄였고 오랜 전쟁이 사람의 심성까지 흉흉하게 만들어 놓은
탓이리라. 그러니 미군의 입장에서는 한 트럭에 몇 만불씩이나 하는
군수품의 수송을 선뜻 맡길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불신으로 인해 일반업자들이 미군물자의 수송을 맡는다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할뿐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누가 가져다 주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법. 미군이
직접 납품업체로부터 수송하던 캔 맥주를 시험적으로 대리수송해볼 기회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용역 형태의 계약이 아니라,한 납품업체에서 특정부대
까지 수송하는 잠정계약에 불과했지만,차량에 대한 사전검사와 운전기사에
대한 신원보증까지 거친 뒤에야 부대출입증을 발급받을수 있었다.
어쨌든 우선은 미군부대에 출입이나마 해볼수 있는 길이 터진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은 일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계약이었다. 어디서 저절로 떨어진 행운이 아니라,집념과
노력을 쏟아 내가 스스로 찾아서 만들어낸 기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