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황희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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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문화인물 방촌 황희(1363~1452년)는 국민이면 누구나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 몇가지는 알고 있는 조선조의 명재상이다. 그의
에피소드를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도량이 넓고 식견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겠지만 반면에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쉽다.
그렇지만 그의 진면목은 강직하고 청렴한데 있었다.
황희는 고려말 공민왕 12년에 수도인 개경(현 개성)에서 황군서와
김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구부이고 본관은 장수. 그는 창왕1년에
문과에 급재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으나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요즘말로 말하면 반체제적 재야인사가
된 셈이다. 조선조 태조3년에 그는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에 제수되어 세자우정자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나 반드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두드러진 일만 하드라도 이조판서때 송사처리문제로 파직되었다가
행랑도 감제조에 복위되었고 1416년에는 세자 양영대군의 선행을 옹호
하다가 파직되었으며 1418년에는 세자 폐출의 불가를 극간하다가 교하로
유배되었었다. 1430년에는 좌의정으로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필을
죽여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일에 개입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
되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431년에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뒤
1449년 치사할때까지 18년동안이나 국정을 통리한 것은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기
때무이라 할수 있다.
거기다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이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다. 황희는 치사한 뒤에 중대사는 세종의 자문에 응할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다.
특히 세종말기에는 세종의 숭불과 관련하여 세종과 유학자 중신들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왕을 보좌하여 세종성세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며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그렇기때문에 정부가
그를 2월의 인물로 선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관련된 에피소드 몇가지는 알고 있는 조선조의 명재상이다. 그의
에피소드를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도량이 넓고 식견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겠지만 반면에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쉽다.
그렇지만 그의 진면목은 강직하고 청렴한데 있었다.
황희는 고려말 공민왕 12년에 수도인 개경(현 개성)에서 황군서와
김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구부이고 본관은 장수. 그는 창왕1년에
문과에 급재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으나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요즘말로 말하면 반체제적 재야인사가
된 셈이다. 조선조 태조3년에 그는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에 제수되어 세자우정자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나 반드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두드러진 일만 하드라도 이조판서때 송사처리문제로 파직되었다가
행랑도 감제조에 복위되었고 1416년에는 세자 양영대군의 선행을 옹호
하다가 파직되었으며 1418년에는 세자 폐출의 불가를 극간하다가 교하로
유배되었었다. 1430년에는 좌의정으로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필을
죽여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일에 개입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
되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431년에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뒤
1449년 치사할때까지 18년동안이나 국정을 통리한 것은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기
때무이라 할수 있다.
거기다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이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다. 황희는 치사한 뒤에 중대사는 세종의 자문에 응할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다.
특히 세종말기에는 세종의 숭불과 관련하여 세종과 유학자 중신들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왕을 보좌하여 세종성세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며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그렇기때문에 정부가
그를 2월의 인물로 선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