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학도 조동화씨라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용평론가 조동화씨라면 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약학을 전공한뒤 고교교사 대학강사로 전공을 강의한 기간보다
무용평론가로서 외도를 한 것이 훨씬 긴 50년 가까이 되기때문이다.

서울대약대 재학시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운 일 이외에는 "무대밖의
무용인"이었지만 그의 춤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무용평론에 씨를
뿌리고 후진들을 길러낸 것이나 우리 무용계가 발전할수 있게 채찍질한
것도 빼놓을수 없는 그의 족적이긴 하나 그보다 그의 의지가 오롯이 바쳐진
결정은 올 10월호로 지령200호를 맞는 월간 "춤"이다.

75년 "동아사태"로 동아방송국 제작과장직을 물러난 그는 당시 무용공연이
한해에 다섯손가락에 들 정도밖에 없었던데다 그 어느 개인도 손대본 적이
없었던 무용전문지를 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월급을 아껴
인사동골목에서 사모은 골동품들을 팔고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3월
"춤"지 첫호를 내놓았다. 79년부터는 문예진흥기금의 제작비 지원을
받았으나 사재를 털고 친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8년여전
100호를 낼 때에는 경제적 사정이 너무 어려워 "종간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용의 저변 확산과 더불어 유가판매부수가 400부로
늘어나고 무용공연광고가 10여건씩이나 되는데다 문예진흥기금지원액수도
150만원으로 증액되어 얼마만큼 숨통이 트인 편이다.

어려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원로무용인들의 "춤" 폐간과 편집권참여
요구가 존립과 위상을 위협했다.

그러한 역경속에서도 지난 16년8개월동안 한번도 결간 한적 없이 그맥을
이어왔다. 수많은 정기간행물들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썰물처럼
사라져가는 잡지계의 무상한 풍토속에서도 띠풀처럼 생명력을 유지해온
전문지이기에 "200호"의 의미는 더욱 값진 것이다. 또한 세계에서 한국
미국 영국 프랑스등 4개국에서만 나오는 6개의 무용전문지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도 자부심을 갖게된다.

우리 무용계를 가꾸는데 선도역을 하고 대내외의 정보지로서의 역할을
해온 "춤"이 최근 그 위상에 대한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는바 없지 않지만
그의 공적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