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청량산'] 육육봉 품에 안겨 晩秋를 느껴보자

보현보살이 있다는 아미산, 관음보살이 산다는 보타낙가산,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청량산.

중국 불가에서 꼽는 3대 명산이다.서기 636년,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건너간 자장스님이 수도한 곳은 그중에서도 청량산이었다.

자장은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유품과 진신사리를 양산 통도사, 오대산 중대,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에 나눠 모셨다고 한다.

이른바 현존하는 5대 적멸보궁이다.자장은 오대산을 청량산으로 여겼다.

진신사리 중에서도 정골사리만을 그곳에 모신 까닭이다.

"너희 나라에도 청량산이 있으니 거기서 나의 진신을 보리라" 자장은 꿈에 나타난 문수보살의 말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오대의 이 산, 저 봉우리에서 기도했다.

어느날 경북 봉화의 한 작은 산에 들른 고승의 되뇌임.

"아, 이 산이 청량산이거늘" 오대산은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기는 하지만 지금 청량산이라고 부르는 곳은 봉화땅의 청량산뿐이라는 이야기다.

봉화의 청량산을 찾았다.

산세가 어떻기에 청량이란 이름을 가져왔을까.

가벼운 산행을 겸해 1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공원매표소를 지나 비포장길로 5분정도.

산행안내판이 세워진 비탈머리에서 시작했다.

오른편은 깍아지른 바위절벽, 왼편은 낭떠러지의 좁은 길이 이어졌다.

나뭇잎 사이 먼 산 능선의 스위스풍 풍치에 넋을 놓으며 20분정도 오르자 허름한 산막이 나타났다.

"산허랭뱅이"를 자처하는 이대실씨의 초막산막(산꾼의집), 옆에는 어릴적 퇴계가 30리길을 걸어 공부하러 왔다는 오산당(청량정사)이다.

때마침 자리를 비운 이대실씨의 초막산막에서 누구나 마실수 있게 해논 구정차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바로 옆 오른쪽의 괴사목을 지나자 내청량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재동자 사진전을 보고 침목계단을 올랐다.

삼각우총이란 세개의 굵은 가지가 뻗어 있는 소나무가 보였다.

원효와 의상이 청량사를 지을 때 뿔 셋 달린 황소가 재목을 운반했고 준공 하루전 생을 다해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우(牛)부도나 다름없다.

일직선상의 오른쪽은 본당인 유리보전.

현판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지불(紙佛)로 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협시불인 문수, 지장보살과는 달리 이제까지 단 한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본당옆 바위연꽃(石蓮) 한송이 앙증맞게 핀 석축 옆에서 물일을 보던 주지 지현스님.

"내청량사 자리는 연꽃의 꽃술부분이에요. 오대산 상원사 터와 흡사해요. 원래 연꽃 모양의 6.6봉(12봉)으로 둘러쳐진 청량산 전체를 한 가람으로 보고 당우를 배치했는데 그 중앙에 유리보전을 세웠지요. 삼각우총 앞 사자목에 사리탑을 세워 탁필봉에서 흘러온 정기가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았고요"

다시 초막산막을 거쳐 응진전쪽으로 난 산길로 들어섰다.

도중에 신라명필 김생이 10년 글공부를 했다는 김생굴 오름길이 있다.

최치원이 마시고 한층 똑똑해졌다는 총명수 샘을 지나면 어풍대.

진경산수화가 떠오르는 내청량사 전경을 완상할수 있는 지점이다.

조금 더 가면 금탑봉 아래에 몸을 기댄 응진전.

외청량사다.

16나한상이 있는데 공민왕비 노국공주 기도처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왼쪽 모서리에 노국공주상도 보였다.

훗날 자제위(子第衛.미소년 시중)에 의해 어이없게 살해당한 공민왕은 원.명이 교체될 무렵, 홍건적에 밀려 이곳에 피란왔었다.

그때 노국공주가 16나한을 모셨다는 것이다.

건너편 축융봉쪽에는 당시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과 공민왕당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내청량보다 더 웅장한 외청량 응진전의 전경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백구와 나(퇴계)"만이 알고자 했던 청량산 육육봉 품에 안기려는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