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2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창작 뮤지컬 ‘레드북’.
오는 22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창작 뮤지컬 ‘레드북’.
지금까지 무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발칙하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창작뮤지컬 ‘레드북’에서다. 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 놓고, 통통 튀는 캐릭터로 재기발랄하게 표현한다.

배경은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 안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또라이’로 불리는 20대 여성이다. 구직 현장에서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자 똑같이 되갚아 주고, 그 죄로 감옥에 갇혀서는 이렇게 말한다.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낡은 침대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신이 사랑하는 미지의 남성 ‘올빼미’와 성적 판타지를 즐기는 상상이다.

극은 이런 엉뚱한 상상을 소설로 풀어내고 싶어 하는 안나가 ‘진짜 소설가’로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야한 상상을 담은 소설 ‘레드북’을 출간한 안나는 늘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여성에게 ‘강요된 정숙함’의 프레임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브라운은 겉모습만 신사일 뿐 남성들의 영역을 지키려다 사랑 앞에 무너져 버리는 풋내기로 그려진다. 안나에게 빠져들며 스스로 변화하려는 브라운의 모습이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나는 남성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에 충실한 이들을 천박하게 여기며 자신과 구분 짓는 여성들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

‘여성의 최대 목표는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영국 신사들을 풍자하는 장면이나, 여성의 솔직함이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그간 억압받았던 사랑과 증오, 광기를 글로 풀어내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딕 존슨에게 찾아갔다가 성추행당할 뻔하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주체성’이 빛난다. 브라운이 구해줄 타이밍에 안나는 자신의 두 발로 그를 걷어차 버린다.

당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안나를 만들어낸 유리아, 지질하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박은석은 맞춤옷을 입은 듯했다. 여성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의 설립자이자 여장 남자를 연기한 지현준과 뮤지컬 ‘빨래’의 할머니로 유명한 김국희가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1인 다역을 소화해내는 앙상블의 연기와 노래도 뛰어나다. 안나의 상상 속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낡은 침대를 타고’ 등 귀에 착 감기는 넘버(삽입곡)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합작한 한정석(극작),이선영(작곡) 콤비의 신작이다. 오는 22일까지, 4만~6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