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SNS' 폭로·음해 통로냐, 공론의 장이냐
익명으로 운영되는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 대나무숲’에 지난 21일 ‘조교한테 갑질을 당했다’는 사연이 올라왔다. 한 학생이 “학생회 주도의 농성에 참가하느라 과제를 제때 내지 못했는데 조교가 과제 점수를 0점 처리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어떤 수업인지 추측할 수 있도록 초성(머리글자)도 공개했다.

해당 조교는 “과제 제출 기한을 어기면 0점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개강 초기에 공지된 수업 규칙”이란 반박글을 올렸다.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익명성 뒤에 숨어 무고한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헐뜯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26일 대학가에 따르면 페이스북 페이지 대나무숲은 이를 이용하는 학생이 늘면서 대학 내 대표적인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자리잡았다. 대나무숲은 관리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익명 쪽지를 받아 글을 대신 게시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관리자도 누가 글을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대나무숲은 2013년 12월 개설된 ‘서울대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130여개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강모씨(27)는 “학교 커뮤니티에도 익명 게시판이 있지만 익명성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어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는다”며 “대나무숲은 휴대폰으로 접속하기도 편하고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어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사이에선 익명게시판 앱(응용프로그램) 블라인드 인기가 여전히 높다. 블라인드는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태가 처음 알려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회사 이메일로 인증을 받고 익명 게시판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접속 기록이 모두 암호화돼 블라인드 앱 운영진도 누가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회사에 다니는 김모씨(28)는 “회사 뒷담화는 물론 선배나 상사들의 ‘갑질 폭로’도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블라인드에 올라오는 글 중 상당수는 회사의 처우나 업무 환경, 인사 등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1700여개 회사의 게시판이 이용되고 있으며 이용자는 최소 5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반 인터넷 공간에서는 신분이 쉽게 노출되거나 실명을 요구하는 일도 있어 ‘익명 SNS’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다. 조직 내 비리, 성추행 등 실명으로는 좀처럼 밝히기 힘든 얘기를 자유롭게 공론화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퍼지고 특정인을 음해하거나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글이 올라와 피해자가 생겨나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올초 ‘중앙대 대나무숲’에는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가 이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다른 여성 피해자도 있다는 글이 올라왔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글쓴이가 뒤늦게 사과하는 글을 올렸지만 이미 해당 남성의 신상 정보가 공개된 뒤였다. 방정현 정앤파트너스 변호사는 “익명 게시판 특성상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기 어렵지만 글 작성자가 특정되면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다”며 “글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상용/황정환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