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일본 간사이 지방 와카야마현 정부가 한 휴양시설을 중국 보아라는 회사에 매각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122억엔(약 1300억원)의 거금을 들여 지었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된 곳이었다. 10년간 연 1억6000만엔(약 17억원)에 임대 계약을 맺고 10년 후에는 무상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헐값 매각 소식에 울분을 토한 건 일본 국민연금 가입자들이었다. 이 시설은 일본 국민연금 산하 연금복지사업단이 일본 전역에 지은 13개의 그린피아(휴양시설) 중 하나였다. 연금 납부자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된 사업이었지만 국민의 피 같은 노후자금만 날린 꼴이었다. 결국 중국 보아가 실체가 없는 페이퍼컴퍼니로 드러나면서 계약은 해지됐다.
510조 국민연금 넘보는 야당…'국민 노후 안전판' 흔들린다
◆“물꼬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 ”

원내 제2당인 더불어민주당과 3당인 국민의당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복지 포퓰리즘으로 국민들의 노후자산인 국민연금을 ‘불쏘시개’로 활용하겠다는 공약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안이 현실화되면 앞서 일본 그린피아처럼 연금 가입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대부분 연금 전문가들은 2000만 가입자들의 미래 노후 자금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국민연금 제도의 근간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장난’이라고 비판했다. 복지부문으로 한 번 물꼬가 터지면 국민의 노후자금이 정치권의 입맛대로 ‘쌈짓돈’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대목에도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국민연금기금 운용 체계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지금과 같은 구조로 만들어졌다. 기금 관리 주체를 기획재정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꾸고 가입자 대표들로 최상위 의사결정기구(기금운용위원회)를 뒀다. 국민연금을 ‘준정부 재정’으로 활용하는 관행을 없애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를 반영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기금 운용은 수익성과 안정성을 우선한다는 원칙(국민연금법 102조)이 정해졌다. 가입자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사업에 투자할 길도 열어 놨지만 대상과 규모는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더민주와 국민의당 등 최근 정치권이 내놓은 국민연금의 공공투자와 복지 투자 방안도 형식적으로는 현행법 울타리 내에서 설계됐다.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국민연금이 매입하거나 최소한의 투자 수익률을 보장하는 방식 등이다. “국민연금이 국내에서 투자하는 여러 가지 국공채 상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것이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정치권 개입 원천 차단해야”

하지만 이런 정치권 공약들은 현행 국민연금 제도와 법령하에서는 시행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퍼주기’ 식의 포퓰리즘을 지향하고 있어 국민연금의 중장기 수익률을 훼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우선 현행법상 국민연금의 투자 전략과 투자 대상을 선택하는 주체는 기금운용위원회다. 복지부 장관 등 정부 측이 기금운용위원으로 참석하지만 전체 21명 위원 중 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사용자 노동자 지역 등 가입자 대표들로 구성됐다. 가입자들이 낸 돈을 엉뚱한 곳에 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 장치다. 연강흠 연세대 교수(현 기금운용위원)는 “정치권이 복지나 공공부문 투자를 원한다면 공약을 낼 게 아니라 기금운용본부가 수익을 노릴 수 있는 투자상품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야당들의 주장과 달리 공공 투자 수익률도 검증되지 않았다. 정부는 현재 기금의 1% 한도 내에서 복지 분야 투자를 집행하는 데 최근 5년간 평균 수익률은 -1.04%에 불과하다. 지난 5년간 플러스 수익률을 낸 때는 2013년(0.07%)이 유일했다.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고 국민연금기금의 적립 비율을 제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좌동욱/유창재/이현진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