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색 보이던 미국 대법원, 진보로 '무게 추' 옮기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으로 숨가쁜 미국 워싱턴 정가에 돌발 변수가 추가됐다. 보수 성향의 연방대법관 앤터닌 스캘리아가 13일(현지시간) 작고한 뒤 공화와 민주 양당이 후임 지명을 놓고 충돌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공화당 대선 후보들까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후임 대법관 지명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대선 쟁점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보수 성향 대법원 바뀌나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스캘리아 대법관이 텍사스의 한 고급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이날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1986년 9월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해 이탈리아계로는 처음 대법관에 올랐다. 29년간 재임하면서 낙태와 동성결혼 허용에 반대하면서 총기 소유는 찬성하는 보수적 판결로 이름을 알렸다.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대법원은 한국과 달리 헌법재판 기능을 겸하는 데다 대법관 임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종신제여서 정부 정책은 물론 의회 입법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6월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개혁법 정부 보조금 위헌 여부에 6 대 3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 미국 50개주 전체에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2008년 6월에는 총기 소지 허용과 관련, ‘무기 소지권은 수정헌법 2조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개개인의 고유 권한’이라며 5 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3건의 위헌소송에서 스캘리아 대법관은 모두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미 언론은 스캘리아의 작고로 보수와 진보가 5 대 4로 갈려 있던 연방대법원의 표결 성향에 변수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미국 대법원은 지난 10년간 총기류 소지나 인종·종교와 관련해 주로 보수적 판결을 내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저녁 특별성명을 내고 유가족에 조의를 나타낸 뒤 후임과 관련해 특정 후보를 언급하지 않은 채 “머지않은 시기에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대선쟁점…미 상원서 ‘전쟁’ 예고

공화당은 즉각 차기 대통령이 후임 대법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NYT에 “공석이 된 대법관 자리를 다음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채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는 “연방대법관을 1년 가까이 공석으로 두는 것은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상원의 책임을 포기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반박했다. 미국의 대법관은 대통령이 상원의 권고와 과반 동의를 거쳐 임명한다.

이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도 후임 대법관 지명 여부가 쟁점으로 부각됐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의 후보 지명을 막는 것은 공화당 상원의원들에게 달렸다”며 2, 3위에 올라 있는 테드 크루즈(텍사스)와 마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을 압박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진보성향 인물을 후임으로 임명하면 연방대법원 성향은 보수에서 진보로 기울게 된다. 크루즈와 루비오 의원도 “차기 대통령이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세했다.

공화당은 미 상원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표 이탈이 없으면 저지가 가능하지만 대선 과정에서 중도층의 표 이탈이나 민주당 후보들의 역공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민주당 대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 의원(버몬트)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후임 대법관을 상원 표결에서 통과시켜야 하는 정치적 역량을 시험받게 됐다. NYT와 USA투데이 등은 스캘리아 대법관 후임에 스리 스리니바산 항소순회법원 판사 등 아시아계 법관도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