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델의 도전적 M&A
델(Dell)이 한바탕 일을 저질렀다.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 EMC를 670억달러(약 76조6000억원)에 인수했다. 사상 최대의 정보기술(IT) 기업 인수합병(M&A)이라고 한다. EMC는 정보 스토리지(저장) 분야에서 매출의 73%를 올리는 기업이다. 대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기업 간 거래(B2B) 업체다. 기업 데이터센터의 관리와 보안 기술에도 남다르다. 델이 전혀 보유하지 않은 영역이다. 전형적인 시너지형 M&A다. 이번 인수를 두고 IBM이나 휴렛팩커드(HP)만큼 큰 컴퓨터 공룡 기업이 탄생할 것이라고 관측하는 전문가도 있다.

IoT 시대 대비 670억달러 베팅

델은 생산 혁신과 유통 혁신으로 성장한 컴퓨터 조립 업체다. 1984년 설립 후 20년간 컴퓨터 판매에서 HP와 1, 2위를 다투었다. 공장은 중국, 콜센터는 인도에 두고 부품도 세계 곳곳에서 납품받는 등 당시로선 참신한 조립과 유통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글로벌 기업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레노버 등 중국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델의 주가는 떨어졌다. 핵심 기술 없이 생산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3년 창업자이면서 최고경영자(CEO)였던 마이클 델은 결국 상장폐지를 선택했다. 지금도 실적은 좋지 않다. 120억달러의 부채를 갖고 있다. 이런 와중에 델은 과감하게 EMC를 사들인 것이다.

IT산업은 내일이라도 당장 파괴적 혁신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모바일 보안이나 스토리지 분야에선 신기술이 잇따라 개발되고 수요도 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의 이메일 사건이나 스노든 사건 등의 영향으로 미국 기업들에서 컴퓨터 보안 기술 수요가 급증한다. 델이 EMC를 인수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사물인터넷(IoT) 시대를 향한 도전이 더욱 크다. IoT에서 스토리지와 보안 기술은 생명과 다름없다. IoT 여명기에 기업 몸집을 불려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이 델에는 있었을 것이다.

美 IT업계, 사업재편 미래찾기

비단 델뿐 아니다. 구글이나 IBM의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IoT다. 이를 위한 M&A에 올인하고 있다. 구글은 2010년 이후 지속적으로 M&A에 나섰다. 2010년부터 올 9월까지 무려 184개 기업을 인수했다. 이들도 최근 들어 인공지능이나 보안업체에 승부를 건다. 딥마인드나 로봇기술 등 색다른 업체에도 과감한 베팅을 한다. M&A의 대명사로 불리는 IBM도 빅데이터 분석과 클라우드 컴퓨팅, 사이버나 클라우딩 보안, 스토리지 소프트웨어 기업들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올 들어 가장 많은 M&A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 M&A 시장은 올 들어 3조5000억달러(약 4000조원)에 달한다. M&A가 극성했던 2007년 4조1200억달러를 웃돌 것이라고 한다. 당시는 금융 M&A가 주도했지만 지금은 IT가 대세다. 물론 경기도 불확실하고 수요도 불투명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꺼린다. M&A가 느는 이유다. 저금리 상태가 유지되는 것도 한몫한다. 정작 미래를 찾는 게 주목적이다.

지금 미국 기업들은 역동적이다. 오래된 기업들은 오래된 기업대로, 새 기업들은 새 기업대로 사업을 리엔지니어링하고 구조를 개혁하는 데 올인하고 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필요한 부분은 M&A를 택한다.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로 의존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있다. 이것이 성장동력이요, 창조요, 미래다.

오춘호 논설위원·공학박사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