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자리가 더 많은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  16일 오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219호 학생연구실이 빈자리가 많아 썰렁하다. 최근 반도체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줄면서 이 연구소 학생연구실 좌석 53개 중 31개가 빈자리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 빈자리가 더 많은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 16일 오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219호 학생연구실이 빈자리가 많아 썰렁하다. 최근 반도체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줄면서 이 연구소 학생연구실 좌석 53개 중 31개가 빈자리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16일 오후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219호 학생연구실의 자리는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15개 좌석 중 학생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4개뿐이었다. 국내 대학 중 가장 큰 ‘팹(Fab·반도체 제조설비)’을 갖춘 이 연구소는 전기전자·재료·물리 등 반도체 관련 전공 대학원생들이 머물며 각종 실습을 하는 공간이다. 1985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석·박사 1500여명을 배출하며 한국의 ‘반도체 신화’를 뒷받침한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엔 반도체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줄어들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층 학생연구실 6곳 좌석 53개 중 절반 이상인 31개(58%)가 빈자리였다. 연구소 관계자는 “2010년께만 해도 연구소가 북적북적했지만 지금은 학생이 줄어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고 말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공과대학에서 반도체·자동차·철강·기계 등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주력 산업에 대한 교육·연구기반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각종 대학평가와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논문 실적 등을 잣대로 이뤄지면서 바이오·나노 등 첨단 분야보다 논문이 적게 나오는 전통 분야의 연구가 외면받고 있어서다.

○고사 위기 처한 반도체 교육

서울대에서는 반도체 분야 석·박사 배출 실적이 2005년 106명에서 지난해 42명으로 대폭 줄었다. 특히 최근 수년간 반도체 연구를 꿈꾸는 대학원 진학자가 급감하면서 2005년 68명이던 석사학위 취득자가 지난해에는 15명에 그쳤다.

[산업현장서 멀어진 공대] 서울대 반도체 석·박사 '반토막'…"중국에 추월 시간문제"
학생 수 감소에는 교수가 줄어든 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황철성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재료공학부 교수)은 “현재 서울대에서 직·간접적으로 반도체를 다루는 교수는 모두 합쳐 40여명이지만 실제 반도체가 주 전공인 교수는 20년 전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 줄었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 두뇌한국21(BK21) 사업 등 논문 실적 위주의 국가연구사업이 본격화하면서 반도체 교수의 신규 채용이 거의 중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기가 쉽지 않아 논문 실적을 올리기에 불리하다. 정부가 반도체를 성숙한 산업으로 판단하고 각종 연구비 지원을 줄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부문과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등 업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인력 공급을 맡은 대학의 반도체 교육은 고사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학 교육과 졸업생 취업 간 미스매치도 심각하다. 서울대 재료공학부는 교수 43명 중 반도체 전공이 5명(11%)에 불과하지만, 박사 졸업생의 30% 이상은 삼성 등 반도체업계로 진출하고 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반도체업계가 세부 전공을 불문하고 졸업생을 싹쓸이해 가서다.

황 소장은 “얼마 전 산학연계기업인 ‘칭화유니’가 미국 마이크론을 인수하려고 시도했던 중국의 칭화대는 서울대보다 5배나 큰 팹, 10배가 넘는 학생을 모아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간 중국에 뒤처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우려했다.

○자동차·철강도 명맥 잇기 어려워

자동차·기계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기아차가 2010년대 들어 글로벌 ‘톱5’에 진입하는 등 성장하고 있지만 대학의 연구실은 거꾸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민경덕 서울대 차세대자동차연구센터장(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은 “정부가 연구개발(R&D)을 민간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면서 지방대학부터 연구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은 “기계공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나사 기어 등 요소설계 등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이미 은퇴한 명예교수에게 강의를 다시 맡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금속도 대학에서는 관련 전공을 다루는 교수를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서울대는 20년 전 12명에 달했던 철강·금속 전공 교수가 지금은 5명으로 줄었다.

다른 대학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현대자동차는 얼마 전 자동차 소재 개발을 위해 지방의 한 명문 공대에 공동연구실 설립을 타진했지만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없어 서울대로 발길을 돌렸다. 학계에서 철강 연구의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위기감에 포스코가 매년 20여명의 철강 전문 교수를 선정해 연구비를 1억원씩 주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김한성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장은 “교수를 채용할 때 전공 분야보다는 논문 실적을 잣대로 판단하다보니 모든 학과가 바이오나 나노재료 전공 교수를 뽑아 학과별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형주/마지혜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