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그러셨죠…함부로 설 수 없는 게 연극무대라고"
영국 로열홀러웨이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을 때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기본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었다. 2009년 UCLA 대학원 연기과에 진학한 이유다. 선배 연기자이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싫었다. 본명(유대식) 대신 남윤호라는 예명을 택했다. 2012년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연극 ‘페리클레스’ ‘정글북’을 거쳐 ‘에쿠우스’의 앨런 역을 맡은 배우 남윤호(31·사진)다.

“2009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해리포터’의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앨런으로 나오는 에쿠우스를 처음 봤어요. 정말 재밌었죠. 그 공연을 본 뒤로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앨런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더 나이 들면 못 하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더라고요. 감사한 일이죠.”

영국 작가 피터 셰퍼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실험극단의 에쿠우스는 올해로 한국 초연 40주년을 맞았다.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17세 소년 앨런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원시적인 분위기 속에 현대인의 영원한 화두인 신, 인간, 성에 대한 고민과 잠재된 욕망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1975년 초연 이후 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 등 스타들이 앨런 역을 거쳐 가며 ‘스타 캐스팅’의 계보를 이어갔다. 올해는 그와 서영주가 앨런 역을, 안석환과 김태훈이 마틴 다이사트 역을 맡았다.

“겉보기엔 그냥 미친 아이지만 앨런은 규범과 질서를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말과 하나가 될 정도로 원초적인 정열을 가진 아이예요. 우리도 표출은 못 하지만 억압된 열정이나 뜨거움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지 않을까요. 비록 ‘말’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런 점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제 안에서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난 6월 연극 페리클레스에서 아버지와 각각 늙은 페리클레스와 젊은 페리클레스를 연기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졌다. ‘아버지의 후광’이 싫어 남윤호로 연기를 한 지 3년 만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왜 하필 연극 무대일까. 그는 “아무나 함부로 설 수 없는 곳이 연극무대”라는 아버지 말을 들려줬다. “배우라면 역할에 대한 욕심이 있게 마련인데, 연극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역할들이 있어요.”

그가 연기했던 페리클레스가 그렇고 앨런이 그렇다. 앞으로 맡고 싶은 연극 배역도 ‘갈매기’의 트레블레프, ‘맥베스’의 맥베스, ‘햄릿’의 햄릿이다. 햄릿은 유 전 장관이 수없이 출연한 작품이다.

“햄릿은 아버지가 정말 다양한 버전으로 출연했던 작품이라 하고 싶으면서도 두려운 작품이에요. 선대 왕이 지켜보는 느낌이랄까요, 하하. 그래도 아버지와 저의 연기 색깔은 확실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너무 거대해서 제가 따라갈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일 테지만요.”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