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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1.75%로 전격 인하했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되고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계, 연구기관, 일부 언론까지 가세해 한은을 거세게 압박했다. 결국 한은이 이런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것 같다.

금리를 인하해서 경기가 살아나기만 한다면야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금리를 인하한다고 해서 경기가 살아나기는 어렵다. 지금 한국 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금리 탓이 아니다. 정부와 정치가 만들어낸 잘못된 정책들 때문이다. 그동안 경제민주화란 이름으로, 각종 정치적 주장으로 얼마나 많은 혁신과 투자를 가로막는 법들이 만들어졌나. 노동시장을 경직시키는 각종 노동 관련법,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 대형마트 규제,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유통구조 개선법,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 등 숨이 막힐 정도로 많다. 이런 규제들이 기업들을 옥죄고 민간 경제의 활동을 저해했기 때문에 경제가 침체돼 오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경기를 살리고 싶으면 이런 규제들부터 걷어내야 한다.

금리 인하로 가계 부채가 증가해 경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부작용은 차치하고 금리 인하를 신중히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득 격차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금리를 인하하기 위해서는 한은이 통화를 늘려야 한다. 이 늘어난 통화가 문제를 일으킨다. 늘어난 통화는 시장 참여자들의 손에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손에 쥐게 되고, 어떤 사람은 늦게 손에 쥐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푼도 손에 넣지 못한다. 물가가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늘어난 통화를 일찍 손에 넣은 사람은 실질 구매력이 증가하게 된다. 물가가 오른 뒤에 새 통화를 입수한 사람의 실질구매력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이렇게 해서 소득과 부가 사회 구성원들 간에 재분배된다.

늘어난 통화를 제일 먼저 손에 쥐는 사람들은 봉급생활자와 같은 일반 서민들이 아니다. 정부, 은행, 기업들과 관련돼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구제 금융을 받은 은행들과 기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부동산이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부동산과 주식을 추가로 획득한다. 새로 창출된 돈으로 수월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봉급생활자들과 같은 서민들은 빈손으로 남게 되고 정부, 은행, 기업, 대형 투자자들은 더 잘살게 된다. 열심히 일하면서 알뜰살뜰 절약하며 살아가는 서민들로서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소득 격차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그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단순히 늘어난 통화를 일찍 손에 쥐느냐 늦게 쥐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소득 격차는 문제다. 이 스토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일찍이 60여년 전에 쓴 인간행동에서 이 위험성을 논설한 바 있다. 이번 금리 인하에는 이런 지적 기반이 결여돼 있다.

작년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이 소득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물론 최근에 피케티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음을 시인했지만, 그의 책에서 소득 불평등 악화의 원인이 통화팽창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피케티가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내세운 미국의 소득 불평등 추세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그 그래프를 보면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 직전에 상위 10%가 차지하는 몫이 50%로 최고점에 이른다. 그 시기가 바로 미국 중앙은행(Fed)이 통화를 무분별하게 발행했던 시기다.

갈수록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고, 부의 편중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무분별한 통화팽창에 그 근원적 원인이 있다. 금리 인하를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그런데 경기 부양에 별 효과도 없는 금리 인하를 어찌 그리 쉽게 생각하는가. 너무 가볍다.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