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들이 예산을 써야 하는 법안 10개 가운데 8개 가까이를 재정 추계 없이 발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법 위반이다.

한국경제신문이 7일 지난해 4분기에 국회의원이 발의한 의원 입법 1319건을 전수 조사한 결과 국가예산이 필요한 257개 중 77.45%인 213개 법안에 ‘비용추계서’가 첨부되지 않았다.

2005년 개정된 국회법에 따르면 예산 또는 기금이 필요한 법안은 예상 비용을 산정한 추계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비용 추계서 의무화 규정은 유명무실하다. 비용추계가 어려울 땐 사유서만 내도록 하는 예외 조항을 의원들이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수 법안은 예산 소요 등 재정 부담 부분을 고의적으로 숨기기 위해 ‘꼼수’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민건강진흥법’을 발의하면서 비용추계서를 내지 않았다. 이 법안은 국민건강증진기금의 30%를 금연 광고 및 홍보사업에 쓰도록 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의원은 “담배 판매량이 일정치 않아 기술적으로 비용추계가 어렵다”는 사유서를 첨부했다. 국민건강증진기금은 2011년 1조7971억원, 2012년 1조8355억원, 2013년 1조8802억원으로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부담액을 산출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의원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포퓰리즘 법안’들을 발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재정 부담 고의적 누락 '꼼수 법안' 급증

국회법에 ‘의안의 비용추계 등에 관한 규칙’은 기술적으로 추계가 어려울 때 등에는 비용추계서를 사유서로 대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국회사무처 의안과 관계자는 “지난 한 해 동안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 건수만 약 4000건”이라며 “그 많은 법안이 비용추계 미첨부 사유에 해당하는지 일일이 심사할 수도 없고, 일단 미첨부 사유서를 내기만 하면 별다른 제재를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부 의원실은 해당 법안의 비용추계를 내지 않은 데 대해 전문인력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대고 있다.

그러나 전문성 부족보다는 재정 부담을 숨기기 위한 고의적 누락이 대부분이라는 게 국회 예산정책처의 해석이다.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이 드는 비용추계를 냈다가는 법안 통과 자체가 어려워 고의적으로 누락했다는 설명이다.

국회예산처가 의원 발의 법안에 대한 비용추계 지원을 하고 있는데 지난 4분기 동안 단 한 건의 의뢰도 없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재정소요를 최대한 줄이거나 미첨부하는 게 낫다”며 “과도한 비용이 소요되는 경우 법안 심사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어 법안 통과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10월 대표 발의한 ‘지방세특례제한법’에도 비용추계서가 빠졌다. 협동조합인 상호금융회사에 대한 지방세 감면 등의 적용 시한을 3년간 연장하는 이 법안 역시 ‘기술적’으로 추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비용설명서를 첨부하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광온 의원과 서영교 의원은 비용추계를 사유서로 대체했다. 박 의원은 지난해 12월 발의한 소득세법 개정안은 건설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퇴직공제금의 소득세를 면제해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용직 근로자의 퇴직공제금이 일종의 복지급여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게 개정안의 취지였다. 하지만 개정안에 따라 비과세 소득 범위가 늘어나 재정감소 요인이 생기는 데도 불구하고 비용추계서를 내지 않았다.

서 의원이 발의한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특별법 일부개정안’은 대학생이 등록금을 대출받는 경우 재학 기간에 대해서는 대출이자를 면제해 주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재정소요가 명백한 이 법안에도 비용추계서가 붙지 않았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