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난쟁이 던지기 놀이’ 장면. 저자는 “존엄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던져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한경 DB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난쟁이 던지기 놀이’ 장면. 저자는 “존엄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던져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한경 DB
안정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를 탄 라틴어 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작품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원작자인 파르칼 메르시에의 본명은 페터 비에리로 스위스 출신 독일 철학자다. 독일 최고의 철학 석학으로 불리는 그가 최근 출간한 철학 에세이《삶의 격》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다.

[책마을] '난쟁이 던지기 놀이'…모두가 즐겁다면 문제 없다고?
저자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세 가지 틀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바라본다. 개인 간의 존엄성이 부딪히거나 개인과 집단의 존엄성이 충돌하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저자는 먼저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인간은 누구의 부속품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스스로 하기 때문에 존재 가치를 얻는다. 저자는 ‘난쟁이 던지기’ 놀이를 사례로 든다. 말 그대로 누가 키 작은 남자를 더 멀리 집어 던지는지를 겨루는 놀이다. 비에리는 이 놀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과 짧은 언쟁을 벌이고, 급기야 그날 대회에서 던져진 ‘난쟁이 남자’를 찾아가 따진다. “타인의 재미를 위해 구경거리가 된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남자는 반박한다. “나는 자발적으로 나선 겁니다. 던져지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

누가 봐도 존엄성을 해치는 순간이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존엄성은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되며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던져선 안 된다”고 정리한다.

저자는 이어 다양한 차원에서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에선 인간 사이의 만남에서 생길 수 있는 존엄성 훼손을 조명한다. 그는 상대방을 깔보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해야 할 때 인정하지 않는 것도 존엄의 훼손이라 말한다. 사적인 은밀함도 존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이 은밀함이 깨져 밖으로 흘러나갔을 때 어떻게 존엄이 무너지는지도 짚어낸다. 존엄이란 말에서 쉽게 떠오르는 ‘존엄사(안락사)’ 문제를 비에리는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개념으로 설명한다.

옮긴이는 “존엄성은 생산적으로 어울려 사는 삶의 한 방식이고, 각 개인이 서로를 이끌어주고 서로에게 길을 터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굴욕감이나 모욕을 주지 않고서도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 때로는 상대방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개인이 소외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존엄이란 단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화두로 다가온다.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얘기하고, 흥미롭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들을 ‘존엄의 세계’로 이끈다. 차분히 앉아 한 장씩 읽어나가면 지적 즐거움의 바다를 항해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소설가로도 유명한 저자의 필력과 사유의 폭에 감탄이 나온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