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도르 제리코의 ‘엡섬의 경마’(1821, 파리 루브르박물관).
데오도르 제리코의 ‘엡섬의 경마’(1821, 파리 루브르박물관).
과학과 미술은 겉보기에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나는 이성에 바탕을 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감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과 달리 적어도 서양미술의 역사 속에서 과학과 미술은 늘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CEO를 위한 미술산책] 미술과 과학, 서로 자극주며 발전…미디어 아트 등 새 영역 개척도
이탈리아 르네상스(15세기~16세기 초) 회화가 이룩한 대상의 완벽한 3차원적 재현 뒤에는 미술과 과학의 달콤한 밀월관계가 있었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적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핵심 기법인 원근법과 명암법 모두 당대의 과학적 업적에 신세 진 것이다. 가까운 물체는 크게, 먼 곳의 물체는 작게 일정 비율로 축소해서 표현하는 선(線)원근법은 기하학에 바탕을 둔 것이고 가까운 물체는 선명하게 먼 곳의 물체는 흐릿하게 묘사하는 대기원근법은 광학(光學)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대기원근법은 빛의 산란작용(태양 빛이 공기 중의 작은 입자들과 부딪쳐 사방으로 재방출되는 현상)을 참조했다.

예술가 상당수가 과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예술과 과학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음을 입증한다. 선원근법 이론을 정립한 알베르티는 건축가였고, 정교한 명암 표현법인 ‘스푸마토’ 기법을 널리 유포한 다빈치 역시 과학자였다.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리다 말고 수학 공부에 몰두했고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의 요청에 따라 무기 개발에 나서기도 하는 등 자연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미술은 과학의 도움으로 사실적 재현의 미학을 완성해 나갔고 과학은 화가의 상상력에 힘입어 미지의 영역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둘의 관계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전반 사진의 등장이었다. 사진은 회화보다도 더 완벽하게 현실을 인화지 위에 재현했다. 과학이 처음으로 예술의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오랫동안 화가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던 과학이 그 꿈을 앗아간 것이다. 둘은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로 나아가는 듯했다.

재능 있는 화가들은 사진에 대적할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들은 객관보다는 주관을, 사실보다 상상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대체 미학을 만들어 나간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빛의 순간적 인상을 화폭에 재빠르게 옮긴 것은 그런 움직임 중 하나였다.

흥미로운 현상은 이 마법의 신기술을 담당한 주역의 상당수가 전직 화가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순한 복제 기술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을 바꿨지만 곧 기계적인 작업에 신물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뭔가 자신만의 개성을 담을 수 없을까 고민했다. 결국 사진가들은 회화의 구도를 따라 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담기 시작했다. 사진은 그렇게 과학이기를 거부하고 다시 예술의 영역으로 유턴했다. 화가들 역시 사진을 이용해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의 그림에서처럼 질주하는 말의 다리가 앞뒤로 뻗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렇게 미술과 과학은 다시 예전의 우호적 협력관계를 회복했다.

오늘날 미술과 과학의 관계는 과거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발전했다. 사진의 등장이 미술과 과학의 긴장을 유발했지만 그게 되레 약이 된 것이다. 예술이 그 시대의 삶과 시대정신을 담는 시대의 거울이라고 가정한다면 테크놀로지가 모든 삶을 지배하는 오늘날 과학이 배제된 예술이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1960년대 탄생한 비디오아트를 신호탄으로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고 있는 미디어아트는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최근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볼 수 있는 쌍방향관계의 일상화는 예술과 과학의 관계를 숙명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갈수록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인터랙티브 아트(관객 참여 미술)에서처럼 이제 예술도 작가의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감상자와 상호 소통하며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기성의 산업제품을 미술품의 전부 혹은 일부로 그대로 사용하는 미술 개념의 변화 역시 과학과 미술의 관계를 직접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통미술에선 과학이 예술의 기술적 조력자였지만 작가의 개성과 감성, 상상력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에서 둘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메워주는 사이좋은 동반자가 됐다. 과학은 예술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예술은 과학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뤄 나간다. 미술과 과학의 밀월관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게 틀림없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