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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회사의 중남미 영업 부서에서 일하는 김모 대리(34·남)의 눈은 2주째 벌겋다. 월드컵 개막에 맞춰 브라질 현지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과 한국의 낮과 밤은 반대. 브라질 법인 마케팅 담당자의 업무협조 이메일은 언제나 늦은 밤에 날아온다. 급한 요구 사항을 들어주다 보면 시곗바늘은 어느덧 새벽 2시를 향해 간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매일 월드컵 보시죠?”라고 물어본다.

쌓인 피로에 대답할 기력마저 떨어진 김 대리는 그냥 웃어 넘긴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한국 대표팀 경기도 보고 싶지 않네요. 그냥 월드컵이 빨리 끝났으면 합니다.”

한국 대표팀이 알제리에 큰 점수 차이로 지면서 16강 진출이 쉽지 않지만 월드컵은 월드컵이다. 축구팬들은 유럽과 남미 강호들이 경기하는 모습만 봐도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월드컵을 즐길 수 없는 직장인들도 있다.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인 지금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축구팬도 아닌데 새벽 출근이라니

이번 브라질 월드컵 경기는 한국시간으로 오전 1·4·7시 등에 열리고 있다. 한국 축구경기가 열린 날엔 서울 광화문 여의도 강남 등에 조기 출근족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축구는 여럿이 모여 봐야 제맛’이라는 지론을 가진 부장 때문에 ‘새벽 출근’이란 불벼락을 맞은 금융사 박모 대리(33·여)는 월드컵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한술 더 떠 부장은 “경기를 보며서 아침도 같이 먹자”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서 남자 직원들은 부서 내 홍일점인 박 대리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자주 있는 행사도 아닌데 프랜차이즈 로고가 박힌 샌드위치를 사들고 가기가 민망했던 박 대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과 샌드위치 등 부서원들의 아침 간식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축구 열기’가 한국 못지 않은 일본계 기업의 김모 주임은 ‘아침이 있는 삶’을 즐기고 있다. 일본인 지사장이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있는 날엔 “오전 10시까지 출근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한국과 러시아 경기에 이어 일본과 그리스가 맞붙은 20일 등 계속 출근 시간이 한 시간씩 늦춰졌다. 김씨는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면 남들보다 두 배로 혜택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축구광(狂)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지각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한 정보기술(IT)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은 회사에서 자가용으로 10분 안팎 거리에 산다. 김 과장은 지난 18일 러시아전을 앞두고 출근 전략을 짰다. ‘샤워는 전반전이 끝나면 빠르게 하는 걸로 하자. 경기는 추가 시간을 합쳐도 8시 50분엔 끝나겠지. 서둘러 가면 9시 전후에 회사에 도착해 축구보다 지각한 티는 크게 안 날 거야.’

이날 아침 김 과장은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경기 막바지를 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도로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막혔다. ‘경기 후 출근족’이 한꺼번에 몰렸던 것이다. 결국 9시20분이 돼서야 회사에 도착했고 경기를 보다 지각한 티를 ‘팍팍’ 냈다.

◆새벽 생맥주에 오전 내내 ‘골골’

오전 7시에 러시아전이 시작된 지난 18일 일찍 출근해서 회사 동료들과 경기를 함께 즐기려는 직장인들도 많았다. 회사 앞 점포들은 이 같은 조기 출근족들을 잡으려는 마케팅이 한창이었다. 한 대기업에 다니는 홍 대리는 이날 오전 6시30분에 회사 앞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세트를 샀다. 이 빵집은 경기 며칠 전부터 가게 바로 옆 호프집과 제휴를 맺고 샌드위치 세트를 산 사람들에게 축구를 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고 홍보했다. 홍 대리가 들어간 호프집엔 동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테이블을 보니 500㏄짜리 생맥주잔이 널려 있었다. 거나하게 맥주판이 벌어진 후였다. 어쩔 수 없이 그도 한 잔 쭈욱 들이켜야 했다. “이날 호프집에서 함께 경기를 본 동료들은 전부 오전 내내 ‘골골’ 하더군요. 물론 발동(?)이 걸려 점심시간 때 더 마신 분들도 많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 정보업체에 근무하는 신모 연구원도 한국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 사무실 근처 호프집으로 출근했다. 호프집에는 신 연구원의 회사 외에 몇몇 다른 회사 직원들도 와서 단체 응원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난히 낯이 익은 여성을 발견했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동창이 인근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 당시에는 말 없이 공부만 하던 소녀였는데 부쩍 예뻐진 모습에 신 연구원은 괜시리 기분이 들떴다. 그날 명함을 주고받고 월드컵과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게 신 연구원의 전언이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오래된 터라 계속 연락하며 ‘썸’을 타볼 계획입니다.”

◆‘돈 내기’ 했다가 우정에 금가기도

‘돈’이 걸린 내기는 회사 동료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한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김 대리는 요 며칠 같은 부서 이 대리가 껄끄럽다.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돼서다. 사연은 이렇다. 한국전이 열리기 바로 전날. 같은 부서원 10명 정도가 경기 스코어 맞히기 게임을 하기로 했다. 무승부를 예측한 사람은 김 대리 한 명이었다. 문제는 전날 내기를 할 때 김 대리가 현금이 없었던 것. 돈을 찾아오기 귀찮았던 김 대리는 내일 출근해서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게임 총무인 이 대리는 무조건 경기 시작 전에 현금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게 원래 내기의 룰이라는 것.

다음날 응원과 경기 시청 흥분에 집중하던 김 대리는 이 대리에게 돈을 주는 것을 깜빡했다. 경기를 마친 뒤 의기양양하게 승자의 여유를 부리던 김 대리. 이 대리에게 돈을 모아달라고 하자 “경기 시작 전에 돈을 주지 않아 내기에서 자동 탈락됐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서원들도 “그게 룰이지. 아까워서 어떡해”라면서 김 대리를 은근 약올렸다. 결국 게임비는 다음 한국전으로 그대로 이월됐다.

돈을 따도 슬픈 직장인이 있다. 화학업체의 김모 팀장은 알제리전이 끝난 뒤 사내에서 ‘김스트라다무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별명을 부르는 동료들의 소리는 ‘이 매국노!’처럼 들렸다. 김 팀장은 그냥 돈을 잃어주자는 생각으로 한국이 4 대 2로 질 것이라고 했는데 덜컥 ‘매국노 족집게’가 된 것이다. 결국 김 팀장은 이날 상금 37만원에 자기 돈까지 보태 동료들에게 저녁을 거나하게 쏘았지만 나빠진 이미지가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황정수/안정락/김은정/강현우/김대훈/김동현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