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피해자에게도 품위는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종종 근린국에 대한 적개심을 내치에 이용한다. 피해자 의식까지 더해지면 회복 불능이다. 아베의 망언이나 극우적 도발도 본질은 같다. 일본 언론의 최근 히스테리는 한국이 불쑥 성장한 데 대한 졸렬한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도 대중 인기에 필사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종반기에 독도문제를 갑작스레 꼬아놓고 물러났다. 워싱턴 우래옥에서 오바마와 클린턴에게 제법 길게 독도문제를 설명한 것 외엔 별도의 사전 절차가 없었다는 해명을 듣고 적지않이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독도문제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한국은 아직 결정권자가 아니었던 거다. 이것이 한국 비극의 본질이다.

1965년으로 거슬러 가는 징용자 배상 문제를 박정희 정부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청구권 자금은 대부분이 산업자금으로 전용되었다. 그러나 협상이 끝난 1975년부터 1977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신문공고를 냈고 신고를 받았고 금전보상이 이루어졌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청구권 협상 초기에 징용자 1인당 피해액을 5000달러로 제시하면서 총액 25억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청구했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달러 중 신고를 거쳐 10%가 채 안 되는 2200만달러를 징용 보상금으로 지급하고 서둘러 사안을 종결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들어 2007년 돌연 배상절차가 ‘재개’되었다. 어쩌면 1977년의 배상 경과에 대해 몰랐을 수도 있고 보상액 문제였을 수도 있다. 시중에는 1인당 3000만원 등 액수까지 떠돌았다. 때문에 온갖 도덕적 해이가 폭발했다고 당시 관련자들은 말하고 있다. 보상액을 500만원으로 낮춘다는 등의 소동을 거친 끝에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이 제정되었다. 지원 절차를 다룰 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게 20만명의 징용 피해자들이 신고를 마쳤다. 이들에게는 의료보험 등 지원절차가 개시되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백서조차 남겨진 것이 없다.

한국 정부를 매개하지 않고 징용 피해자 개인들에게 직접 보상하겠다는 것이 당초 한일 청구권 협상에 나섰던 일본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일괄타결 원칙이 수용되었다. 그렇게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협상은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그 권리가 되살아났다. 반인권적 범죄에서는 개인 차원의 보상요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유사 결정이나 원폭피해자에 대해 법적 청구권은 없지만 보상받을 권리는 인정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도 계기가 되었다. 한국 대법원도 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1944년 8월 징용령 발동에서부터 1945년 2월 미군의 폭격으로 항만이 봉쇄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미불 임금을 놓고 벌어진 쟁송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모두 90만명의 조선인들이 일본 기업들에 고용 혹은 배치되었다.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아픈 기억에 던져진 질문들이다. 임금 통장이나 급여 영수증조차 빛이 바랬을 시간이 흘렀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 정부의 태도다. 아직 명확한 공식 설명조차 없다. 피해의식을 부채질하거나 조장한다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한국과 일본은 워낙 사실 인식부터 차이가 크다. 사과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독일의 거듭된 사과를 모범사례로 거론하지만 일본인은 600만 유대인 학살에 일본이 비교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공존은 몰라도 화해는 불가능하다. 어떻든 박근혜 정부가 징용자 배상 문제를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이다.

피해자라고 해서 그 피해로부터 무한정의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보상에 대한 정당한 요구도 과도하면 품위를 잃게 된다. 그렇게 비칠 수도 있다. 성숙한 나라가 언제까지 피해의식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그래야 그 다음의 허다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