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쌀 관세화, 더 미룰 수 없는 정치현안
정치 현안과 달리 통상 현안은 미룰수록 파급효과가 커진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사태, 국정원 개혁, 기초연금 도입 등과 같은 메가톤급 국내 현안이 정치권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니, ‘하찮은’ 대외 통상현안쯤은 국회 캐비닛에 묻어두고 싶은 것일까.

내년 말 반드시 실행해야 할 쌀 시장 개방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상 처음으로 쌀의 수입관세율을 정해야 하고, 쌀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가공품들(국수, 초콜릿 혼합물 등)의 관세율도 별도로 정해야 한다. 양곡 수입추천제 개정, 쿼터량 관련 국내 입법도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지금 시점이면 쌀 농가들은 관세율을 높게 책정해서 개방 여파를 줄여 달라고 해야 하고, 개방 이후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쌀산업 장기 발전모델도 제시해 정부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관세율 책정에 신경을 곤두세울 만도 하다. 그런데 모두가 잠잠하다.

정부가 쌀 시장 개방 원칙부터 확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관련 업무가 추진될 리 만무하다. 아직도 통상 주무부처는 시장개방과 추가 유예라는 두 가지 정책변수를 놓고 고민만 하고 있다. 쌀 개방을 재차 연기하기 위한 국제협상을 벌일 권리가 있다는 식의 논리가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민감성을 감안하면 쉽게 결정내릴 내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와대는 뒷짐지고 있고, 이미 정부부처 간 갈등 표출을 금하는 엄명까지 내린 바 있으니, 관료 속성상 통상부처와 농업부처 간 이견을 제시하고 조정작업을 진행할 리도 없다.

우리가 쌀 시장개방을 다시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은 국제 상식이다. 이미 관세화 최종기한이 2014년 말로 설정돼 버렸기에, 이를 연기하기 위해선 국제무역기구(WTO)에 의무 면제를 신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다. 20년간 연기혜택을 받고 있는 통상대국인 한국을 위해 국제사회가 의무 면제 결정을 내려줄 리 만무하다. 설령 이런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우리가 지급해야 하는 대가는 가혹할 수밖에 없다. 5%의 관세만 부과하고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값싼 수입쌀이 이미 연간 40만t 분량인데, 이것을 80만t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수입쌀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한 상태에서 연간 80만t이 시중에 유통되면, 국내 쌀 농업은 초토화될 게 뻔하다. 그런데도 농민단체들은 “의무수입량 증량 없이 시장개방을 유예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에 현혹돼 추가 유예에 관한 무책임한 논쟁만 하고 있다.

유토피아를 좇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정치권 임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하고, 최선의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일이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일본과 대만도 쌀 시장을 개방해 품질의 고급화 전략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저품질 시장은 중국과 태국에 내어주더라도, 고부가 산업인 고급 쌀 시장에서 이미 한국보다 앞서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쌀 시장 관세화는 국제적으로 타당한 정책임은 물론이고 수입쌀의 의무수입 물량의 증가를 막음으로써 그만큼 국내 쌀값의 하락폭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쌀 농업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정책 방향이다. 어차피 개방해야 할 것이 뻔한데도 ‘폭탄 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과 정부에 제언한다. 쌀 개방이 이뤄지는 시점이 2015년 1월1일임을 조속히 확인하고, 쌀 품질관리 강화와 비용절감으로 품질과 가격 경쟁력 제고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종합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수출시장 개척 등 마케팅 전략과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쌀 수출 이해 관계국들과의 관세율 책정을 위한 국제협의도 서둘러 진행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을 이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한꺼번에 진행해야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원목 <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wmchoi@ewh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