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물자원순환연구단 연구원들이 중금속과 인을 처리할수 있는 물질을 시험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물자원순환연구단 연구원들이 중금속과 인을 처리할수 있는 물질을 시험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1.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으로 유명한 스위스 제약회사 노바티스. 2011년 연구개발(R&D) 지출은 96억달러(약 10조원)로 한국 정부 R&D 예산의 60%에 육박한다. 노바티스 생의학연구소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6000여 연구원들이 신약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R&D 성공률은 5% 남짓.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다.

#2. 한국 정부의 R&D는 실패하는 법이 거의 없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기업청이 지원한 R&D 성공률은 각각 97%(2011년)와 92.9%(2008년)로 세계 최고 수준. 하지만 연구결과가 사업화로 이어진 비율은 약 20%로 영국(70.7%) 미국(69.3%) 일본(54.1%)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산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연구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기술·지식재산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열쇠가 되면서 한국의 국가 R&D 예산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008년 11조784억원이었던 정부 R&D 예산은 2012년 16조244억원으로 늘었고, 올해 또 16조9000억원으로 전년보다 5.3% 증가했다. 정부 R&D 예산은 출연·융자·출자·투자의 방식으로 여러 대학, 연구소, 기업 등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은 4.03%로 이스라엘(4.38%)에 이어 2011년 이미 세계 2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한국이 기술 강국이라고 자부하기는 힘들다. 산업부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무역수지는 2010년 기준 0.32를 기록했다.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한 금액이 수출액보다 3배 가까이 많다는 의미다. 국가 R&D 사업화 건수도 2011년 7253건으로 2010년(9521건) 2009년(8262건)에 비해 줄었다.

특허청에 따르면 2008년부터 4년간 정부 R&D에서 나온 특허가 기업으로 이전된 비율은 5.7%. 이전된 기술 중에서도 실제 수익으로 연결된 사례는 23.6%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산업계에서는 “삼성전자 등 일부 글로벌 기업을 제외하면 한국의 기술경쟁력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실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평가에서 한국의 기술경쟁력은 올해 11위에 그쳤다. 2005년 세계 2위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하락세다.

◆도전·비전 없는 R&D

[스트롱 코리아] 한국, 기술경쟁력 2위서 11위로 '추락'…R&D 성공률 최고지만 사업화율 '꼴찌'
높은 R&D 성공률에 비해 사업화 비율이 낮은 건 어려운 연구과제에는 아예 처음부터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실패하면 다음번 연구비 확보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과제만을 찾아 신청한다. 지원기관도 실적을 높이기 위해 그런 행태에 동조해왔다. 한 정부 출연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도전적인 R&D를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패했던 경력이 있으면 정부에서 지원을 꺼려하는 게 사실”이라며 “이러다 보니 새로운 연구보다는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안전한 연구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지 못하고 ‘연구를 위한 연구’가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기껏 돈을 들여 개발해놨지만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대학과 연구소는 기술산업화로 이어진 비율이 4.4%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는 산업과의 연계없이 보여주기식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상상력 더한 I&D가 돼야

전문가들은 창조경제 시대에는 R&D에서 상상개발(I&D·Imagination & Development)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존에 있던 지식에 상상력만 더해도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애플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2007년 처음 나온 ‘아이폰’에 들어가는 통신, 반도체, 소프트웨어 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플은 ‘휴대폰으로 통화도 하고,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더해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냈다.

2000년 MP3플레이어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낸 한국의 아이리버가 애플 ‘아이팟’에 밀린 것도 기술력이 아니라 ‘상상력’ 부족 때문이다. 단순히 MP3플레이어만 파는 게 아니라 온라인으로 음원을 구매할 수 있는 장터를 만든다는 애플의 아이디어로 승패가 갈렸다는 것이다.

창조경제 전도사인 윤종록 미래부 2차관은 “미국 의과대학 숫자의 30분의 1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세계 바이오·헬스케어 분야 창업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두 상상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술이전 보상체계 마련 필요

기술이전과 사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기여자에 대한 보상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산업부 조사에 따르면 2011년 공공기관에서 기술이전·사업화가 이뤄질 때 담당자에게 금전적 보상을 주는 기관 비율은 44.3%, 업적평가에 반영하는 경우는 37.5%에 그쳤다.

정동덕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미국에서 이뤄진 조사에서 기여자에 대한 보상금이 기술이전·사업화 성과 향상에 미치는 영향은 30~4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보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이를 실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