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이명박 대통령의 엊그제 회동은 반값등록금 양육수당 등 복지문제를 돌연 상기시켰다. 곧 대선 유세가 시작되면 국민들은 후보들이 내놓는 호화 복지 메뉴판을 접하게 될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그렇듯이 복지국가라는 구호 역시 정치적 사기(詐欺)라는 사실은 어떤 경우든 변함이 없다. 언젠가는 ‘20세기 집단 오류’의 하나로 보편적 복지나 복지국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연금 제도를 처음 도입했던 사람이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국민연금에 대해 “독일 국민들에게 던져준 정치적 뇌물이었다”고 썼다. 누구의 돈으로 누구를 위한 복지를 감당하는지를 생각하면 비스마르크의 말이 맞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종종 뇌물을 필요로 한다. 알고 보면 대중을 원숭이로 보는 바로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보편적 복지는 아름다운 말이다. 보편(universal)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참(truth)’이라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실은 무차별적으로 나누어 먹거나 모두가 갈라먹자는 어처구니 없는 약탈적 분배규칙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좌익 세력이 찾아낸 기만적 정치 슬로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낙인효과를 막기 위해서라는 이중의 거짓말은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을 뒤섞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을 좌익들은 그렇게 표현한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복지를 통해 경제를 살린다는 허무한 주장이다.

보편적 복지론자들은 국가의 복지지출이 경제를 돌리고 내수시장을 활성화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 그래서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이야말로 복지지출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저소득층은 한계소비성향이 높다는 것이 알량한 근거다. 한계소비성향이 높다는 말은 돈이 생기면 남김없이 바로 써버리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실로 모욕적이다. 복지 수급자의 한계소비성향이 당연히 높지만 그것이 내수를 활성화시킨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복지지출이 내수 경기를 살릴 것이라는 말은 유리창을 깨고 깨진 유리창을 갈아끼우면서 GDP를 올렸다고 주장하는 만큼이나 개그에 가깝다. 복지를 위해 누군가의 돈을 징발할 때 이미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복지가 성경 속의 만나처럼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그 말은 맞다. 그러나 깨진 유리창에 투입되는 돈은 누군가가 생산성이 더 높은 일에 투자될 돈이었던 것이다.

복지는 정의(定義)상 수급자의 생산성에 무관하게 주어진다. 그런 자원 배분은 결국 경제를 죽인다. 이 사실은 너무도 명징한 것이어서 귀납적 검증이 필요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스웨덴의 연대임금이 그런 경우다. 연대임금은 생산성과 상관없는 소위 시민적 권리에 입각한 임금 제도다. 그 결과 생산성이 낮은 중소기업은 도태되고 말았다. 왜? 지불 능력을 초과하는 임금을 장기간 주었으므로…. 그렇게 중소기업은 절멸되었다. 스웨덴은 지금도 재벌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생산성으로부터 유리된 분배 규칙은 그렇게 경제를 파괴했다.

추가적인 에너지의 투입 없이 한번의 동력만으로도 영원히 작동하는 기계를 영구기관이라고 부른다. 만일 영구기관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석유와 가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8세기 인도 수학자 랄라가 불균형 비대칭 바퀴를 설계하면서 영구기관이라고 주장한 것이 시초다. 그러나 근대 열역학이 나오면서 영구기계는 논리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진실에 직면하는 데는 언제나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복지를 통해 경제를 돌리고, 그것에서 세금 걷어 또 복지를 하고, 그렇게 경제는 다시 돌아가고…! 전 국민을 공무원으로 만들면 일자리 문제가 해결된다는 개그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복지 지출이 경제를 굴려갈 것이라는 주장은 영구기관에 대한 허망한 기대와 다르지 않다. 복지는 인간의 자비심에 기초한 지출이다. 인간은 타인에 동정공감 한다. 복지는 인간의 자비심에 기초한 것이지, 시민적 권리나 국가의 의무라는 바탕 위에서 설계될 수 없다. 무차별 복지(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잔여적 복지(선택적 복지)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달리 표현하면, 복지는 자연인 개개인이 하는 것이지 정치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