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예술에서 익숙함은 때로 독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면 더 그렇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화와 드라마 소재로 수없이 재탄생했고, 발레만 해도 100개 이상의 버전이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물론 비극적인 결말도 훤하다.

그런데도 1965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총 420여회, 해마다 10회꼴로 공연됐으며 그때마다 구름 관객을 몰고 다녔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 ‘어둠과 춤추는 남자’로 불렸던 영국 로열발레단의 전설적 안무가 케네스 맥밀런(1929~1992) 버전이다.

맥밀런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30년 만에 한국 무대에 오른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오는 7~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이 작품을 8회 공연한다.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스웨덴 왕립발레단, 라 스칼라 발레, 호주발레단 등 최고의 발레단만 공연한다는 이 작품의 한국 공연은 1983년 영국 로열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 초연한 후 처음이다.

“죽어 있는 줄리엣을 본 로미오는 반미치광이가 돼 마치 거대한 고깃덩이를 옮기듯 무대 위를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널브러진 발레리나의 몸을 억지로 예쁘게 만들 필요도 없었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지 않아도 됐다. 무용수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날것의 감정에 충실하는 게 먼저였다.”

맥밀런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한 무용수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맥밀런은 발레리나가 깃털처럼 가볍게, 공주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게 춤춰야 한다는 상식을 깼다. 이 드라마 발레를 위해 무용수들은 테크닉뿐만 아니라 감정 연기에 많은 공을 들인다. 어깨의 작은 떨림, 멍하게 서 있는 여백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아름다움과 처절함의 극한을 보여주는 ‘발코니 파드되(발코니 2인무)’는 이 작품의 백미다. 잠을 이루지 못한 줄리엣이 발코니로 나오면 로미오가 정원에 등장해, 서로의 사랑을 뜨겁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들어올리는 리프팅 동작이 관능적이면서 힘이 넘친다. 극의 후반부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오열하는 로미오의 분노와 박탈감, 청순하지만 반항적인 숙녀로 비극을 부채질하는 줄리엣의 감정선과 몸동작은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웅장하고 섬세한 음악도 감동을 더한다.

“동화 속 이야기는 진절머리가 난다”던 발레계의 아웃사이더 맥밀런은 내놓는 작품마다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그의 안무는 왕자와 공주의 해피엔딩을 그리는 클래식 발레에 비해 다소 어둡고, 그로테스크했다. 그의 안무 스타일은 어두웠던 어린 시절과도 맞닿아 있다. 누구나 겪을 법한 보편적인 장면으로 고전을 풀어낸 그의 작품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로열발레단이 자부하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맥밀런의 작품은 무용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번 무대에는 안지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와 세계적인 발레리노 로버트 튜슬리가 캐스팅됐다. 10년간 연인 사이로 지내다 다음달 사랑의 결실을 맺는 발레단의 간판스타 황혜민 엄재용, 시니어 솔리스트 김나은과 수석무용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도 호흡을 맞춘다. 발레단의 꽃미남 수석무용수 이승현은 황혜민과 12일 공연에 나선다. 1만~10만원. (02)580-1300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