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어린이날
아이를 데리고 공원을 찾은 젊은 부부가 휠체어를 탄 아가씨와 마주쳤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 사람 좀 봐.” 깜짝 놀란 아빠가 아이에게 장애 가진 사람을 놀리거나 흉보면 안된다고 타이르려고 하자 아이가 말했다. “언니가 쓴 모자가 너무 예뻐.”

엄마가 새 옷을 사입히려 꼬마 손을 잡고 주말 세일 인파로 붐비는 백화점을 들렀다. 아이는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엄마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 위해 아이를 한 켠으로 데려가서 쪼그려 앉았더니 뜻밖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온통 낯선 사람들의 구두와 다리만 보이는 게 아닌가. 아이 눈에 비친 백화점은 멋진 상품이 진열된 곳이 아니라 그냥 위협적인 장소였던 거다. 엄마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아 올렸다.

평생 불우한 아이들을 어린이 눈높이에서 돌본 이는 폴란드 출신 의사·교육학자였던 야누스 코르착이다.

1942년 8월 코르착이 원장으로 있던 바르샤바 유대인 거주지역 고아원으로 나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스실’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코르착은 아이들의 동요를 막으려고 마음을 추스렸다. 200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옷� 단정하게 입히고 좋아하는 책이나 장난감 넣은 가방을 메게한 다음 소풍가듯 길을 나섰다. 그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줄기 연기로 사라졌다. 유엔은 코르착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79년을 세계아동의 해로 지정했다. 10년 뒤엔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인권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이는 소파 방정환이다. 그는 유교 도덕에 얽매어 있던 아이들에게 인격과 감성을 부여하려 했다. ‘젊은이’와 구분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이도 소파다. 1923년 5월 첫 번째 어린이날엔 아이들의 권리를 세상에 알렸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90번째 어린이날을 맞아 각종 행사가 줄을 잇고 있지만 가족 해체와 가난 등으로 인해 방치된 아이들도 수십만명에 달한다. 더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무작정 떠받들며 과보호와 과잉관심에 경쟁하듯 빠져들고 있다. 공부든 취미든 아이들 자신의 생각과 꿈이 아니라 부모의 욕심이 반영된 것이라면 또 다른 학대다. 어린이가 잘 보호되고 다듬어지지 못할 경우 부메랑이 돼 나중에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5월의 여린 잎 같은 아이에게 당신은 어떤 부모인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