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 삼성이나 LG와 같은 주요 브랜드는 잘 알려져 있고 특히 우수한 품질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잘 모르는 나라에 불과하다. 미국 사람들은 현대 자동차를 몰고 삼성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그들이 한국과 관련해 신문에서 보는 것은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나 북핵 문제 정도다.

과거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시나브로 다른 선진국 기업들과 경쟁하는 상황이 됐고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특성이 제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에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한국의 정체성, 특히 정체성 가운데 긍정적인 요소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작업이다. 그런 작업에서 핵심적으로 필요한 것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개념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요소와 소재,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외국인들의 이해가 가능한 문화적 존재로서, 그리고 지식 사회로서의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일본말 ‘사무라이’는 아프리카 사람이든 남미 사람이든 누구라도 보편적인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사무라이 경영학, 사무라이 도덕률, 사무라이 전법 등 사무라이 개념에서 파생된 갖가지 책들이 출판돼 왔다. 사무라이 영화는 수백 개가 넘고 전 세계 어린이들은 사무라이 게임을 하면서 논다. 명령과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엄격한 행동 규범을 유지하는 충성스런 전사들은 이제 일본만의 개념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문화의 일부가 됐다.

비슷하게 일본 용어인 ‘닌자’ 역시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문화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어린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 때 닌자처럼 담벼락을 오르거나 다른 사람을 감시하거나 공격하면서 닌자 흉내를 낸다. 닌자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닌자 개념의 보편화로 생겨난 각종 혜택을 누리는 것은 종주국 일본이다.

한국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좀 안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의 대중가수나 패션에 대해 조금 아는 정도다. 그들의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한국의 전통은 아직 뚜렷이 부각되지 않았다. 한국 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음악이나 영화, 그리고 일부 대중문화에 국한된다.

한국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개념으로 선비정신(Seonbi Spirit)을 채택하는 것은 어떨까? 선비정신은 한국 사회와 역사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고려나 조선 시대 중심적인 인물들을 돌아보면 선비 전통은 현대 국제사회에 딱 들어맞는 모범적인 인물상을 제공할 수 있다. 개인적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적절한 도덕적 행동에 대한 모델을 제공할 수도 있다. 지식인들이 소소한 개별 영역에서 조용한 전문가로 살아가는,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잃고 살아가는 시대에서 선비정신은 절박하게 필요하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수단이 돼 버린 세상에서 선비정신은 한국의 교육을 재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고 외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상품도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비정신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신은 한국의 교육 특징을 재발견할 수 있고 교육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구몬 학습법이라고 하는 것과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선비 정신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수정될 수 있다면 일본의 사무라이와 같은 방식으로 국제사회로 확산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소비품을 생산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들이 사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이 진정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 사람을 포용하는 역할도 가능하다. 지금의 세상은 무절제한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다. ‘선비’는 한국의 전통에서 태어난 보편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이만열 < 경희대 교수·비교문학 epastreich@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