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평창에는 3만달러 아비투스가 필요하다
올림픽은 민족들이 권력 의지를 다투던 시대에 태어났다. 경제와 정치의 이중 혁명에 힘입어 먼저 민족국가를 출범시킨 유럽에서 깃발이 오른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였을 뿐인 민중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고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시기에 등산이 국가 스포츠가 되었고 눈쌓인 알프스 북벽에는 국가를 대표한다는 청년 등반가들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올림픽은 그런 시기에 시작되었다.

최근의 일화는 베이징 올림픽이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중국 민족이 용틀임하며 역사의 무대에 오르는 것을 봤다. 중국인은 바로 여기서 인민 아닌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질상 베이징 올림픽의 원조라고 할 만한 것은 베를린이다. 대부분 역사책은 지금도 베를린 올림픽의 주최국을 독일 아닌 나치 독일이라고 쓰고 있다. 당초 1차 대전 기간에 개최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터지면서 연기되었던 것이 1936년에 개최된 히틀러 올림픽이다. 1차대전 패배의 굴욕을 딛고 은밀하게 담금질해온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게르만 드라마였다. 2차 대전의 집단 광기는 그렇게 축적되었다가 분출되었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갓 넘어선 일본이 올림픽에 집착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패전을 딛고 새로운 민주 국민으로 재탄생했다는 신호였다. 바로 그런 원망이 결집되면서 일본 민족의 구심력을 축적했다. 서울 올림픽 역시 그랬다. 한낱 신생 독립국에 불과했던 한국이 어엿한 산업국가요 국민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공포한 대사건이었다. 그 응축된 힘의 결집이 바로 같은 시기에 격렬한 형태로 내부로부터 분출하였던 민주화 운동이다. 88올림픽은 국민들의 에너지를 정치혁명으로 결집시켜 갔다. 물론 역사를 하나의 단일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라도 사건 중심의 역사를 통해 집단 기억을 형성한다.

올림픽이 냉전이라면 월드컵은 열전이다. 하나가 차가운 기록경기라면 다른 하나는 집단의 경기요 승패를 결판내는 격렬성을 보여준다. 올림픽이 개인과 도시 대항전이라면 월드컵은 집단과 국가들의 대항전이다. 스포츠 엘리트와 광장의 대중이 갈라지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전자가 승리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광장을 점령하고 북을 쳐대는 거대한 집체성을 특징으로 한다. 바로 그런 점이 2002 월드컵으로 하여금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직접 · 참여의 광장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에토스가 차가운 엘리트 이회창이 아닌 뜨거운 민중 노무현을 선택했다. 올림픽을 아폴론이라고 한다면 월드컵은 디오니수스다. 이성과 열정의 갈등이며, 질서와 파괴의 대립이다. 대중성으로 따지면 월드컵→하계→동계 올림픽의 순서다. TV광고료 순서이기도 하다.

공식 카운트는 안 되지만 올림픽에 포함된 첫 동계 종목은 피겨였다. 당연히 백인,북구,선진국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연아의 종목이 되어 있다. 한국은 그렇게 커나왔다. 동계 올림픽은 하계보다 더한 냉정성의 경기요 대중 아닌 중산층의 경기이며 눈과 얼음 위에서 승패 아닌 기록과 점수를 다툰다. 산악을 낀 한적한 교외에 휴양 리조트가 있어야 하고 광장의 분출하는 광기가 아니라 경기를 마친 저녁에 벽난로에 둘러 앉는 풍경이 어울리는 그런 이성적 스포츠다. 역대 개최국이래봤자 대부분 국민소득 4만달러 수준인 국가들이다. 스포츠 아비투스(행동양식)가 하계 올림픽과도 다르고 월드컵과는 너무도 판이하다.

이것이 국민소득 3만달러가 평창의 성공 조건이 되는 이유다. 평창 올림픽을 놓고 벌써부터 자잘한 손익 계산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문제는 3만달러에 걸맞은 아비투스다. 지금 평창 올림픽에 대한 국내 반응은 한마디로 월드컵 수준의 아비투스다. 땅땅땅 소리가 먼저 들린다는 식이다. 그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

정규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