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대우문화복지재단 설립 2년 뒤인 1980년 200억원 상당의 기금을 재단에 새로 출연했다. 그러면서 "한국 학문의 기초분야 진흥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대우문화복지재단은 국제정치학자이자 고미술 전문가이며 초대 통일원 장관을 지낸 이용희 전 서울대 교수(1917~1997)를 이사장으로 영입,기초학문 전반의 균형 성장을 위한 학술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재단 이름도 '대우재단'으로 바꿨다.

신일철 고려대 철학과 교수(인문과학),노재봉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사회과학),김용준 고려대 화학과 · 장회익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자연과학)가 분야별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 자문위원과 이용희 이사장은 매주 한 번씩 운영위원회를 열고 어떤 분야의 어떤 학자를 지원할지 토론을 벌였다.

그동안 대우재단이 지원한 연구과제는 모두 1370건.참여한 학자들은 1800명에 이른다. 연구 지원에 따른 결과물은 '대우학술총서'와 '대우고전총서'로 발간된다. 대우학술총서는 1983년 11월 언어학자인 김방룡 서울대 교수(2001년 작고)가 쓴 《한국어의 계통》을 첫 권으로 선보인 이래 학술연구의 보고(寶庫)로 자리잡았고,학술지원 활동 30년 만에 600권째 책 《우리 학문이 가야 할 길》(아카넷)을 최근 출간했다.

분야별로는 인문학이 219종으로 가장 많고 자연과학 208종,사회과학 127종,다학제간 연구서 47종의 순이다. 《이슬람법 사상》 《인도게르만어 지역의 분류》 《수치천체물리학》 《한반도 식생사》 《서양 고서체학 개론》 등 상업적 출판사에선 내기 어려운 책들이 대부분이다.

1998년 대우재단이 와해되는 가운데서도 대우재단의 학술지원 사업은 계속됐다. 규모를 줄여서라도 지원을 계속하기로 한 것.1999년에는 '석학연속강좌'를 마련해 지난해까지 12회에 걸쳐 국내외 석학들의 강좌를 진행했고,제대로 번역한 동서양 고전을 보급하기 위해 '대우고전총서'도 2000년부터 발간해 《순수이성비판 1 · 2》 등 24권을 출간했다. 2006년부터는 국내외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반연간지 《지식의 지평》도 내고 있다.

'대우학술총서' 600권 기념호는 다양한 학문 분야의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우리 학문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꾸몄다. 김광억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김두철 고등과학원 원장,이태수 인제대 철학과 교수가 '우리 학문의 현황'을 주제로 한 대담을 통해 학계의 양적 팽창,번역과 관련된 문제,영어강의,학문의 융 · 복합 추세에 따른 문제 등을 짚었다. 우리 학문이 아직도 서구 학문과 학자들을 따라가는 '학문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서구 중심으로 재편된 국내 학계에서 우리 학문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이들은 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자생력을 확보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교류해 나갈 것인지가 우리 학계의 과제라고 지적한다.

각 분야의 최고 학자들이 집필한 14개 학문 분야별 현황과 방향은 이 책의 백미다. 장경렬 · 최정운(서울대)김경현 · 김균(고려대) 이진우(포스텍) 김성국(부산대) 장영민(이화여대) 교수 등이 역사학 · 철학 · 경제학 · 정치학 · 사회학 · 인류학 · 심리학 · 법학 · 수학 · 물리학 · 화학 · 생명과학 · 의학의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고 전망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