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까지 학원 전전…아이들은 파김치

'자녀 장래' 갈등으로 부부관계도 살얼음판

서울 개포동에 사는 중학교 2학년생 김모군은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 4시쯤이면 엄마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학원으로 이동한다.

간식과 숙제는 대부분 엄마와 함께 차안에서 해결한다.

오후 5시부터는 요일마다 다르게 수학 영어 화학 물리 천문 과학실험 등 과학고에 입학하기 위한 과목을 학원에서 과외받는다.

오후 7시 학원 인근 분식점이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식사를 마치고 12시까지 여러 학원을 전전한다.

집에 들어와서는 끝내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하고 새벽 1시께야 곤한 잠을 청한다.

그러던 이 학생은 최근 별도의 스케줄을 마련해야 했다.

매주 월요일 방과 후 정신과를 찾아가는 일이다.

학업에 지친 나머지 우울증, 만성 무기력증이 점차 심해지고 주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사회성이 많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 터였다.

정신과 전문의는 학부모에게 "아이가 학습 과잉으로 인해 심신이 지쳐 있으니 학원공부 시간을 줄이는 대신 자율학습 시간과 취미활동을 늘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물론 이 학부모는 말로는 "충고를 듣겠다"고 해놓고선 실천하려 하지 않았다.

'학원 중독증' 어린이 부모의 상당수가 대개 이 학부모와 같은 입장이라는 게 의사들의 지적이다.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가족 관계에 균열이 가고 있다.

'헬리콥터 부모'(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간섭을 멈추지 않는 부모)의 극성으로 '학원 중독증'에 빠진 아이는 파김치가 되고 있다. 아이의 장래를 놓고 부부는 갈등의 골을 키운다.

일부에서는 조기 유학 붐에 떠밀려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기러기 아빠'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왜곡된 교육 현실은 부모 자신의 생활이나 부부관계를 사면초가로 몰아세우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런 현상을 '교육 스트레스 증후군' '교육 염려 증후군'이라 부르고 있다.

정찬호 마음누리 신경정신과 원장은 "부모는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해 일단 아이를 학원에 보내며 한 번 학원에 보내기 시작하면 성적이 오르든 그렇지 않든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아이가 학원에 안 간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견딜 수 없는 게 학원 중독증의 본질"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술 담배 인터넷 게임 휴대폰 등 세상 모든 중독이 '불안'과 긴밀한 관계가 있듯이 학원 중독증도 마찬가지"라면서 "불안 속에서 무엇인가에 쉽게 중독되고 일단 중독된 뒤에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더욱 불안한 증상이 이어진다는 게 공통점"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한국의 교육 열기가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학원 중독증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정신질환 차원의 중독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학원 중독증을 방치하면 다른 증상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반건호 경희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조기 교육에 시달리다 학원 중독증에 걸린 아이는 성인들의 '만성 피로 증후군'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며 "극심한 경우 자폐 증상과 유사한 사회에 대한 무관심 및 애착 결여로 이어질 수 있고 왕따(집단 따돌림), 은따(은근히 따돌림 당함)가 될 위험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아이들만 과열 교육에 멍든 게 아니라 부부관계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사랑의 전화' 상담백서에 따르면 가족 문제 가운데 자녀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걸려온 전화는 2004년 445건(38.5%), 2005년 551건(44.5%), 2006년 543건(45.9%)으로 매년 건수 또는 비중이 늘고 있다.

부모 또는 친정 시댁과의 갈등보다 자녀의 교육과 미래를 둘러싼 부부 간의 대립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김병후 부부클리닉후 원장은 "부부가 자기의 관심사라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텐데 아이들 문제는 자녀의 장래가 걸린 문제라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며 "자녀 문제는 부부 각자의 가치관, 인생관, 기본 성격, 성장 과정 등 모든 요소를 투영하기 때문에 이혼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갈등의 빈도나 강도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김 원장은 특히 "고학력 아버지일수록 어렸을 때 받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기 위해 자녀들에게 관대한 반면 엄마는 육아와 아이의 미래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다 현실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을 택하기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교육 스트레스 증후군의 시작은 한국의 뒤틀어진 교육 환경과 제도,좋은 학벌 직업 경제력 등을 지향하는 외형 중시 가치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자녀가 성장해 남과 조화롭게 살 수 있을지 등 사회가 궁극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하나씩 고쳐 나갈 때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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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중독증 자가진단표>

1.초등학교 때 예체능 과목을 배우지 않으면 평생 기회가 없다고 생각.

2.학원이나 과외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

3.아이가 학원 안 가고 노는 모습을 보면 불안하다.

4.아이 공부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5.다른 사람으로부터 학원 많이 보낸다는 얘기를 듣는다.

6.아이 성적이 안 오르는 것은 학원에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7.학원에 보낸 뒤에는 책임을 다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8.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무엇이든 시키고 싶다.

9.아이가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

10.아이가 학원가기 싫어해도 설득해서 보내는 편이다.

11.순전히 아이 학교 때문에 이사를 한 적이 있다.

12.유명강사가 있는 학원이면 당장 보내고 싶다.

13.나도 어릴 때 학원 많이 다녔다.

14.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무기력한 기분이 든다.

15.이웃집 아이 성적이 올랐다는 말 듣고 꾸중한 적 있다.

16.아이가 커서 부모의 헌신을 기억하길 바란다.

17.아이를 혹사시킨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18.학원 안 보내는 부모는 아이 교육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19.학원비 마련을 위해 별도의 부업을 해본 적이 있다.

<점수>각 항목에 거의 그렇지 않다 0점, 가끔 그렇다 1점, 종종 그렇다 2점, 매우 그렇다 3점.

<판정 기준>

총 점수가 15점 이하:자녀 교육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15~20점:아이 성적이 떨어질 때 학원에 보낼까 갈등하는 정도. 대체로 문제없음.

21~25점:학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상태. 학원에 대한 기대감 큼.

26점 이상:학교보다 학원을 신뢰하는 경우. 학원 중독증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자료:'자녀인생 매니지먼트-패런츠 파워'(순정아이북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