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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과거', 타인의 거울로 마주한 나

      “그들은 부산을 포함해서 서울이외의 곳은 다 ‘시골’로 칭하고 있었다. 또한 위도와는 상관없이 속초에서도 서울은 ‘올라오는’ 도시였다. 은희경의 소설 속 한 문장이 나를 과거의 한 장면으로 데리고 갔다. 방학이 되면 우리 자매는 막내 이모가 계시는 서울로 보내졌다. 이모는 성공한 중산층이었고 동부 이촌동의 ‘맨션’ 에 살고 있었다. 신선한 ‘훼미리 주스’ 가 아침마다 배달되어 왔고 사촌들은 겨울에도 내복 바람으로 집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윗풍이 세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우리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촌동생은 ‘뉴코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백화점에서 새하얀 피겨 스케이트도 구입했다. 목이 긴 피겨 스케이트는 사촌동생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우아한 식탁에는 계란 노른자 빛깔의 ‘체다치즈’가 매 끼니마다 반찬으로 올라왔다. 몸에 좋다며 먹어보라는 이모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된장이나 김치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내 입맛에는 지나치게 느끼하고 밋밋할 뿐이었다. 그날은 이모집에 손님이 왔다. “어머, 웬 애들이 이렇게 많아?” 거실에서 나긋나긋한 서울말이 들려왔고 연이어 이모의 “응, 시골에서 온 조카들이야” 라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순간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명사라고 생각했던 ‘시골’ 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은 생경했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하기 까지 했다. ‘한국의 3대도시’ 중 하나에서 살았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시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골이라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논이나 밭, 소나 닭이 등장하는 마당은 내가 살았던 도시 어

    • <그녀> 당신이라는 책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여름, 친구와 함께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별생각 없이 갔던 강연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두서없는 생각과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다녔다. 책과 방송으로만 만났던 정재승 박사의 강연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공 분야인 뇌과학과 연결 지어 미래사회를 예견하고 비전을 제시해 주어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강연을 듣는 와중에 문득 영화 <그녀>가 떠올랐다. 영화 <그녀&...

    • 영화 <캐롤>, 당신이라는 피사체

      '퀴어(Queer)'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기묘한, 괴상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동성애 혐오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 '퀴어'는 보다 확장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순히 '게이' 나 '레즈비언'의 의미뿐만 아니라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인터 섹스(intersex)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동안 동성애에 관한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었지만 게이 ...

    • 영화 <파수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돌이켜보니 나의 고교시절은 빛나는 여고시절도,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운 시간도 아니었다. 우울하고 흐린 무채색에 가까웠다. 모든 것이 미숙했고 혼란스러웠으며 지독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관계'가 전부인 학창 시절이었지만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었던 탓에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적성과 흥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육과정도 내 우울의 원인이었다. 개별 자아는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는 '학생'이라는 사회적 자아만...

    • 방문을 걸어 잠그는 아이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 중 하나는 '방문 걸어 잠그기'이다. 닫힌 방문 앞에서 부모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아이가 혼자 방에서 뭐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아이가 방문을 잠그고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신호이다.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은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슈필 라움(Spiel...

    • 감정은 옳고 그름이 없다

      아이들은 감정을 통해서 세상을 배운다. 낯선 감정들과 조우하고 익숙해지면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배워간다. 감정의 일차적 학습장은 가정이다. 하지만 감정의 배움터인 가정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이들과 얼굴 맞대고 대화할 시간이 턱없이 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감정을 살필 여력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겪는 다양한 감정은 방치되기 일쑤다. 처리해야 할 감정은 쌓여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정...

    •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는다. 아프지 않은 상처가 없지만 특히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는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래서 더 힘들고 더 용서하기 어렵다. 서로를 가장 위해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인 가족에게서 배척받고 외면받는 경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남이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랜 갈등 끝에 관계를 단절하기도 하지만 내면에는 '죄책감'이라는 또 하나의 상처가 추가될 뿐이다. 안 보고 사는 것도 ...

    • 내 아이가 낯설어질 때

      “아이가 말수가 부쩍 줄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남자) 친구가 생겼는지,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어요. 아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불안해서 문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게 돼요” “감정이 널 뛰듯 해요. 어느 장단에 박자를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의 푸념이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지만 내 아이만은 비켜갔으면 하는 바람을 한 번쯤은 가져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