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에 기대어 쓰다] 영화 <캐롤>, 당신이라는 피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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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Queer)’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기묘한, 괴상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동성애 혐오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 ‘퀴어’는 보다 확장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순히 ‘게이’ 나 ‘레즈비언’의 의미뿐만 아니라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인터 섹스(intersex)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동안 동성애에 관한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었지만 게이 영화에 비해 레즈비언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어 관심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이는 성 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젠더에 의해 또다시 소수자의 위치로 전락한 ‘여성’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어 아이러니하다.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다’는 말은 관용어처럼 흔해 빠진 말이지만 사랑의 순간과 그 속성에 대해 이보다 정확하게 포착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한눈에 반해 늪처럼 빠져들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 속을 헤맬지라도 달콤 쌉싸름한 사랑의 묘약이 던지는 유혹은 누구도 쉽게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캐롤> 의 주인공 캐롤과 테레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눈빛으로 단번에 서로를 알아 본 두 사람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의 사랑이 이성이 아닌, 동성 커플, 그중에서도 여성들 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감정의 사계절을 겪으며 사랑하고 상처받고 헤어진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재회의 장면으로 시작해서 다시 재회의 장면으로 회귀하는 영화의 시퀀스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캐롤은 부유한 남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둔 중산층 가정의 여성이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상처를 간직한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인해 온전한 자신으로 살지 못한 채 오로지 남편과 그의 가족을 위한 부속품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일하는 테레즈는 사진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남자 친구의 청혼에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망설인다.
서로를 향한 눈빛을 교환하며 운명처럼 빠져든 시간이 막 지난 후 캐롤은 끼고 온 장갑을 장난감 매장에 두고 간다. 테레즈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장갑을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캐롤에게 편지를 쓴다. 장갑이 먼저인지, 테레즈의 편지가 먼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불쑥 당도한 사랑 앞에서 둘은 솔직해지기로 한다. 사랑은 점점 속도를 내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은 밀월여행을 떠나게 된다.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연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 안에서 둘만의 우주를 경험하게 된다. 소음도 멈추고 풍경도 정지한 자동차 안은 세상과의 완벽한 차단을 의미했고 그 안에서 둘은 웃고 바라보며 둘만의 은밀한 세계에 빠져든다.
사랑의 시작은 훔쳐보기이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훔쳤고 내 마음을 훔쳐 간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시 훔쳐본다. 한없이 응시하며 사랑을 쫓는다. 응시하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에 못 박아두려는 간절함은 사진 찍는 행위로 가시화된다. 테레즈는 캐롤의 현재를 영원히 간직하고픈 욕망으로 셔터를 눌렀고 렌즈 속에 그녀를 담았다. 필름 위에 맺힌 캐롤은 이제 영원히 테레즈의 소유가 되었다. 여성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인 테레즈의 프레임을 통해 선택된 캐롤의 순간순간은 ‘대상’ 이 아닌 온전한 ‘개인’ 그 자체였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50년대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에 편입시킨 매뉴얼을 발표했으며 동성애로 의심받은 공무원이나 군인 등이 강제로 해고 또는 전역당했다고 한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공식적으로 매뉴얼에서 빠진 것은 1973년이 되어서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자신들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벽과 마주하게 된다. 캐롤에게 그 벽은 남편 하지였다. 하지는 ‘백인, 남자, 부자, 이성애자’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보편성의 테두리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이다. 그는 용인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캐롤을 지배하려 했다. 결국 캐롤은 하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이혼 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자에게는 사회, 문화, 경제 등 대부분의 공적인 영역에의 권력이 무한으로 주어진다.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며 필요에 따라 이를 남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이라는 작고, 사적인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 이 유일하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사랑’이라는 얘기다.
하지는 캐롤을 사랑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양육권 분쟁에 돌입하게 되고 성 정체감을 이유로 캐롤에게서 딸 린디를 빼앗으려 한다. 둘의 이혼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한 채 당시의 사회규범에 의지해 캐롤을 압박한다. 딸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테레즈와 헤어진 캐롤은 결국 “나를 부정하며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라는 말과 함께 법정을 떠난다. 테레즈를 향한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후 내린 결정이었다.
테레즈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허락만 해왔다”던 고백처럼,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의지대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습작처럼 찍어 왔던 사진에서도 사생활을 침해할까 봐 사람의 얼굴은 찍지 않았다. 하지만 캐롤이라는 사랑이 당도하자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카메라 속에 담는다. 테레즈가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캐롤이었지만 또한 자신이기도 했다. 영화 <캐롤> 은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두 여인이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성장 스토리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인 재회의 과정은 성적 지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겠다는 고백이자 거대한 사회적 장벽과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두 여인의 단단한 성장을 담고 있다. ‘로맨스’와 ‘사회 비판’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협화음을 한 편의 우아한 협주곡으로 만들어 낸 감독의 연출력이 놀랍다. 영화는 남녀가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듯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사랑’ 임을 얘기한다. 동성 간의 ‘특별한 사랑’ 이 아닌 ‘보편적인 사랑’, 누구나 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캐롤>의 프레임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의 피사체는 누구인가?’ 라는 집요한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캐롤은 부유한 남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둔 중산층 가정의 여성이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상처를 간직한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인해 온전한 자신으로 살지 못한 채 오로지 남편과 그의 가족을 위한 부속품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일하는 테레즈는 사진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남자 친구의 청혼에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망설인다.
서로를 향한 눈빛을 교환하며 운명처럼 빠져든 시간이 막 지난 후 캐롤은 끼고 온 장갑을 장난감 매장에 두고 간다. 테레즈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장갑을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캐롤에게 편지를 쓴다. 장갑이 먼저인지, 테레즈의 편지가 먼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불쑥 당도한 사랑 앞에서 둘은 솔직해지기로 한다. 사랑은 점점 속도를 내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은 밀월여행을 떠나게 된다.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연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 안에서 둘만의 우주를 경험하게 된다. 소음도 멈추고 풍경도 정지한 자동차 안은 세상과의 완벽한 차단을 의미했고 그 안에서 둘은 웃고 바라보며 둘만의 은밀한 세계에 빠져든다.
사랑의 시작은 훔쳐보기이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훔쳤고 내 마음을 훔쳐 간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시 훔쳐본다. 한없이 응시하며 사랑을 쫓는다. 응시하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에 못 박아두려는 간절함은 사진 찍는 행위로 가시화된다. 테레즈는 캐롤의 현재를 영원히 간직하고픈 욕망으로 셔터를 눌렀고 렌즈 속에 그녀를 담았다. 필름 위에 맺힌 캐롤은 이제 영원히 테레즈의 소유가 되었다. 여성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인 테레즈의 프레임을 통해 선택된 캐롤의 순간순간은 ‘대상’ 이 아닌 온전한 ‘개인’ 그 자체였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50년대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에 편입시킨 매뉴얼을 발표했으며 동성애로 의심받은 공무원이나 군인 등이 강제로 해고 또는 전역당했다고 한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공식적으로 매뉴얼에서 빠진 것은 1973년이 되어서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자신들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벽과 마주하게 된다. 캐롤에게 그 벽은 남편 하지였다. 하지는 ‘백인, 남자, 부자, 이성애자’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보편성의 테두리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이다. 그는 용인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캐롤을 지배하려 했다. 결국 캐롤은 하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이혼 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자에게는 사회, 문화, 경제 등 대부분의 공적인 영역에의 권력이 무한으로 주어진다.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며 필요에 따라 이를 남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이라는 작고, 사적인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 이 유일하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사랑’이라는 얘기다.
하지는 캐롤을 사랑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양육권 분쟁에 돌입하게 되고 성 정체감을 이유로 캐롤에게서 딸 린디를 빼앗으려 한다. 둘의 이혼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한 채 당시의 사회규범에 의지해 캐롤을 압박한다. 딸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테레즈와 헤어진 캐롤은 결국 “나를 부정하며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라는 말과 함께 법정을 떠난다. 테레즈를 향한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후 내린 결정이었다.
테레즈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허락만 해왔다”던 고백처럼,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의지대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습작처럼 찍어 왔던 사진에서도 사생활을 침해할까 봐 사람의 얼굴은 찍지 않았다. 하지만 캐롤이라는 사랑이 당도하자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카메라 속에 담는다. 테레즈가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캐롤이었지만 또한 자신이기도 했다. 영화 <캐롤> 은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두 여인이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성장 스토리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인 재회의 과정은 성적 지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겠다는 고백이자 거대한 사회적 장벽과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두 여인의 단단한 성장을 담고 있다. ‘로맨스’와 ‘사회 비판’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협화음을 한 편의 우아한 협주곡으로 만들어 낸 감독의 연출력이 놀랍다. 영화는 남녀가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듯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사랑’ 임을 얘기한다. 동성 간의 ‘특별한 사랑’ 이 아닌 ‘보편적인 사랑’, 누구나 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캐롤>의 프레임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의 피사체는 누구인가?’ 라는 집요한 물음 앞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