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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설날 아침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걸음으로 30분 걸리는 새벽길을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지날 때다. 멈춰 선 아버지가 지팡이로 가리키며 “숨구멍이 저기 있었구나”라고 했다. 저수지 산 쪽 끝에 얼지 않은 물 위에 오리들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저기만 왜 안 얼었는지 아느냐?”고 질문한 아버지는 내가 미처 답하기 전에 이유를 설명해 버렸다. “물이 들어오는 데는 살얼음만 낀다. 영리한 오리들이 저수지가 다 얼어버리지 않게 밤새 순번 정해 빙빙 원을 그리며 헤엄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도 설날에 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저수지 숨구멍’이 기억나 여쭸다. 그날 아버지의 긴 설명을 옮기면 이렇다. 저수지도 생물이다. 강추위에 모두 얼어붙었으니 저수지가 숨은 어떻게 쉬나 궁금했다. 마침 오리들이 숨구멍을 얼지 않게 밤새 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미물도 저런 지혜로 저수지를 살리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저수지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깨끗하다 해서 좋아하고 더럽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저수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흘러간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나 홀로 저수지를 만들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저 오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인물 그리고 전적(典籍)을 말씀하실 적마다 자식이 알아들었는

    •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선행이 아니라 거래다

      아버지 애창곡은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었다. 29세에 요절한 그가 절규하듯 불렀다. 그 노래를 아버지가 부르는 걸 몇 번 들었다. 전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한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오랜 병원 생활을 견뎌내는 중에 억척스레 노래 공부를 했다. 스승을 모셔 실력을 갖춘 아버지는 노래자랑 대회에서 몇 차례 수상했다. 그때 수상 곡은 백난아의 ‘찔레꽃’.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 도성 남쪽 수비군이 주둔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다.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가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글씨는 순종이 썼다.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이었다. 1910년 일제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담은 장충단을 폐사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상이군경 임의단체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돼 ‘국가도 백성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연설했다. 1991년이었다. 왕조시대에도 나라가 은혜를 입으면 장충단을 세워 기렸다며 민주공화국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처우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감동한 청중 중 한 사람이 저 노래를 처연하게 부르자 모두 따라 불렀다고 한다. 몇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전면개정으로 아버지의 뜻은 관철돼 지금의 보상체계가 갖추어졌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애창곡이 저 노래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라는 노랫말을 쓴

    • 다친 게 아니면 네 다리로 걸어라

      학교 운동장에서 줄달음치다 철봉에 이마를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이마에서 뜨끈한 게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바로 일어서긴 했지만, 친구들이 소리쳤다. 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서다. 덩치 큰 친구가 나를 업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제야 통증이 밀려와 울음이 났다. 따라 울던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업었다. 소식이 먼저 갔다. 대문 앞에서 아버지가 업혀 온 나를 내려놓으라 하고 피 흐르는 상처를 뜯어 봤다. 아버지는 바로 내 뺨을 후려갈기면서 큰소리로 야단쳤다. “칠칠치 못한 놈, 이런 거로 업혀 다녀? 걸을 수 있으면 네 다리로 걸어갔다 와라!” 놀란 나는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왔다. 친구들도 수군대며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눕히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상처를 닦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실로 꿰맸다.  상처는 쉬이 아물었지만, 기억은 오래간다. 이마 왼쪽에 상처 났던 부위는 60년이 흘러도 만지면 아리고 추울 땐 유독 시리다. 당신이 쓰던 바늘과 실로 자식의 상처를 꿰매는 그 날의 충격을 본 어머니의 기억은 더 오래갔다. 툭하면 내 이마를 만졌다. 몇 년 지난 어느 날에도 어머니가 “당신이 의사예요?”라고 그날을 떠올리며 힐문했다. 답을 하지 않은 아버지는 방에 걸린 관우(關羽) 장군의 괄골요독(刮骨療毒) 족자를 내게 가리키며 그림을 설명했다. 그림은 관우가 적군이 쏜 독화살로 입은 어깨 상처를 수술받는 장면이다. 관우가 독이 퍼져 뼈를 긁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량(馬良)과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진정한 사내의 모습은 저렇게 나무기둥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 성공을 담보하는 집중력은 간절함에서 나온다

      아버지가 콩기름 병마개를 발명했다. 기름을 따를 때 찔끔 흘러내리는 건 아까워서라기보다 손에 묻으니 짜증 나서다. 어머니가 기름을 부을 적마다 손을 몇 번씩이나 닦아내는 걸 본 아버지가 병마개를 고쳐주려고 나섰다. 알코올램프를 사다 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손으로 만져가며 병 주둥이에 모양을 냈다. 마개 끝을 길쭉하게 혹은 더 짤막하게, 뾰족하거나 세모꼴로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마개를 끼워 기름을 부었으나 모두 허사였다. 기름이 여전히 병 주둥이를 타고 흘렀다. 며칠을 반복해도 실험은 언제나 실패했다. 오기가 생긴 아버지는 일을 멈추고 마개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콩기름 병뿐 아니라 빈 기름병은 모두 어머니가 수거해 날랐다. 어느 기름이나 따른 끝에는 지질하게 밖으로 흘러내렸다. 지천에 널린 동네 기름병을 수거해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버리는 게 더 어려웠다. 많이 태웠지만 마당은 온통 빈 기름병 투성이었다. 더욱이 실험하다 버린 기름이 부엌에 넘쳐나자 어머니는 아무나 발명하는 줄 아느냐며 투덜댔다.  생전 처음 보는 플라스틱 관련 책, 유체역학이란 책도 독파하며 실험에 몰두하던 아버지도 부아가 나서 실험도구를 불태우기도 했다. 어느 날 밤새 꼬박 연구하던 아버지가 잠깐 조는 사이 기름병을 넘어뜨렸다. 쓰러진 기름병에서 흘러나오던 기름이 멈췄고 더는 지질하게 새어 나오지 않았다. 2년이나 걸린 실험은 무위에 그쳤지만 발명은 순간에 이루어졌고, 간단했다. 병마개를 넓혀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따르는 양이 많아지면 장력에 의해 기름이 똑 끊어지며 더 흐르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2년여 만에 그렇게 우연히 흐르지 않는 병마개를 발

    • 부자지간, 이생진

      부자지간 이생진 아버지 범선 팔아 발동선 사이요 얘 그것 싫다 부산해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자동차 사이요 얘 그것 싫다 육지놈 보기 싫어 그것 싫다 아버지 배 팔아 어머니 사이요 그래 뭍에 가거든 어미 하나 사자 [태헌의 한역(漢譯)] 父子之間(부자지간) 父邪今賣帆船買機船(부야금매범선매기선) 兒兮余惡船中聲紛繽(아혜여오선중성분빈) 父邪然則賣船買動車(부야연즉매선매동차) 兒兮余嫌車上看陸人(아혜여혐차상간륙인) 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