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저 자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고등학교 시절, 대학시절에 시를 전공으로 하였던 친구가 술먹으면서 자신이 시를 그만 쓰게 된 것은 황지우만큼 쓸 자신이 없어서라고 하면 이 시집을 권했다. 그리고 시집을 바로 샀지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이제사 그 시집을 읽었다. 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깊이는 없는 내가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이 시는 그나마 그가 몇 번이나 권해서 읽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의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왜 굳이 이 시를 권했는 지를 알겠다. 그는 이 시를 자신과 대비하면서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는 그랬다. 대학때도 남들 즐거울 때 즐거운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즐거움을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시집 전체에서 흐르는 우울한 분위기가 그 친구와 비슷했다.



다음에는 그 친구의 시를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학창시절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 친구의 시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미안함이 갑자기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