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의 혼

                        샤를 보들레르


어느 날 저녁,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더라.

“사람아, 오 불우한 자여, 유리의 감옥 속에,

진홍의 봉랍 속에 갇혀서, 내 그대 향해

목청 높여 부르노라, 빛과 우정이 넘치는 노래를!

 

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주려면,

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땀과 찌는 듯한 태양이 있어야 하는가를,

그러나 나는 헛되거나 해롭지 않으리,

(중략)

기쁨에 넘친 그대 아내의 두 눈에 나는 불을 붙이리라,

그대 아들에게는 힘과 혈색을 돌려주고

인생의 그 가녀린 선수를 위하여 나는 투사의

근육을 다져주는 기름이 되리라.

 

내 그대 가슴속으로 떨어져, 신이 드시는 식물성 양식,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진귀한 씨앗이 되리라,

우리들의 사랑에서 시가 움터서

한 송이 귀한 꽃처럼 신을 향해 피어오르도록!"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와인 예찬시다. 이 시에는 포도의 탄생과 와인 제조 과정, 숙성된 와인을 즐기는 이들의 내력이 공감각적으로 묘사돼 있다. 포도밭 일꾼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 흘리며 포도를 수확하는 모습부터 지친 노동 끝에 마시는 와인의 향미까지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저녁 식탁에서 와인 잔을 바라보는 아내의 볼은 벌써 발그레하다. 아들의 얼굴에도 건강한 혈색이 돌고 온몸에 힘이 솟는다. 그런 모습을 보는 아비의 마음 또한 붉게 상기된다. 이렇게 해서 포도는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진귀한 씨앗’이 되고, 시인의 마음속에서 신을 향해 피어나는 꽃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시로 재탄생한다.

와인은 이런 맛과 향과 문학과 예술의 빛깔을 함께 품고 있다. 《보물섬》을 쓴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래서 “와인은 병에 담긴 시(Wine is bottled poetry)”라고 말했다. 와인 애호가들이 건배사로 자주 인용하는 말에도 이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모든 와인을 맛보되 어떤 것은 몇 번 홀짝거리기만 하고 어떤 것은 병째 다 마셔라”고 권했다. 홀짝거려야 할 와인과 병째 마셔야 할 와인은 어떻게 다를까.

세계 최고의 와인 전문지 <와인스펙테이터(WS)>는 해마다 ‘올해의 100대 와인’을 발표한다. 전문가들이 그해 나온 1만5000여 종을 평가해 종합 순위를 매긴다. 이들은 라벨을 가리고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맛과 향을 살피고 가격, 생산량, 독창성, 감동지수까지 평가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미국 와인들이 상위권에 많이 오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나파(Napa) 밸리와 소노마(Sonoma) 밸리 와인들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미국 와인의 70% 이상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나파 밸리는 캘리포니아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와인 산지다. 1976년 ‘파리의 심판’이라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에서 프랑스 최고 와인들을 제치고 나파 밸리 와인들이 레드·화이트 부문을 휩쓸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에는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한 샤토 몬텔레나를 비롯해 귀여운 오리 모양의 상표로 잘 알려진 덕혼 등 명품 와인들이 즐비하다.

나파와 붙어 있는 소노마 밸리도 고급 와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잭 런던의 ‘달의 계곡’에 등장하는 이곳은 2010년 미국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기온은 지중해성 온난 기후 덕분에 1년 내내 한국의 초여름과 비슷하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끄는 곳이 나파와 소노마의 최정상 경계선에 있는 ‘프라이드 마운틴 빈야드(Pride Mountain Vineyard)’다. 이곳은 원래 ‘정상에 있는 농장(Summit Winery)’으로 불렸다. 1872년 이전에 와인을 양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역사가 150년이 넘는다. 이 포도밭을 사들여 와인을 본격적으로 생산한 사람은 치과 의사 출신의 짐 프라이드다.

‘프라이드(PRIDE)’ 와인은 그의 이름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긍지’와 ‘자부심’이라는 본래의 뜻까지 포함한다. 2004년 세상을 떠난 그의 뒤를 이어 지금은 부인과 두 자녀가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고도 640미터로 배수가 잘 되고 토양층이 두텁다.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를 경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프라이드 마운틴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훌륭하다”고 극찬했다.

나파와 소노마의 접경지인 이곳 ‘와인 공동구역(JWA)’에서 생산된 와인은 최근 10년 동안 ‘올해의 100대 와인’에 6차례나 선정됐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백악관에서 각국 정상에게 즐겨 대접한 것도 프라이드 와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날 때 내놓은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30회 이상 백악관 만찬주로 사랑을 받아왔다.

프라이드 와인에서는 화려하면서도 깊은 향, 잘 익은 타닌의 여운이 느껴진다. 짙은 레드커런트와 훈훈한 모카, 잘 익은 자두와 고운 흙, 향신료의 풍미도 어우러져 있다.

프라이드 와인을 좋아하는 유명인 중에는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오른 크리스티 커, 미국프로풋볼 최고의 쿼터백으로 군림했던 댄 마리노, 할리우드 배우 겸 코미디언 윌 페렐 등이 있다. 크리스티 커는 나파 밸리에 와이너리를 갖고 있으며, 파라이드 와인을 워낙 좋아해서 짐 프라이드의 딸 수잔 프라이드와 합작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이곳 와인 공동구역에서 생산되는 ‘팔로마(PALOMA)’ 와인도 최고급이다. 비둘기를 뜻하는 팔로마는 고대 페르시아 전쟁사에 등장한 평화의 상징이다. 스페인 작곡가 이라디에르의 노래 ‘라 팔로마(La Paloma)’로도 유명하다. ‘예스터데이’ 이후 전 세계 뮤지션들이 가장 많이 리메이크한 곡이다. 이 노래의 아름다움에 감명 받은 설립자의 부인이 포도밭과 와인 이름을 팔로마로 지었다고 한다. 소노마 와인 상표에도 흰색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팔로마’ 와인은 2003년 ‘올해의 와인’ 챔피언에 뽑혀 세계 최고 와인 반열에 올랐다. 균형감 있고 절제된 세련미와 우아한 향미까지 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라이드와 팔로마는 생산량이 많지 않고 숙성 과정이 까다로워 그동안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말 수입 길이 열려 국내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됐다. 팔로마는 아시아 최초의 독점수입이라고 한다. 다소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이다.

마셔 본 사람들은 “몇 번 홀짝거리기만 할 와인이 아니라 병째 다 마실 만한 와인”이라고 말한다.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와인 공동구역’의 독특한 테루아(토양)와 잘 숙성된 와인의 깊이 있는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기쁨에 넘치는 두 눈’에 불을 붙이고 ‘신의 식물성 양식’과 ‘진귀한 씨앗’으로 우리 가슴속에 사랑의 시를 꽃피울 수도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지금쯤 나파와 소노마에는 따뜻한 햇살 아래 초록색 포도 잎들이 산허리를 감싸며 살랑거리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와인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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