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처녀

                    고두현




남해 금산 정상에서

산장으로 내려가다

화들짝 돌아보니



봄바람에

치마꼬리 팔락이며

구름꽃 피워 올리는

얼레지 한 무더기



칠 년 전 저 길

오늘처럼 즈려밟고

가신 어머니

수줍은 버선코.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바람난 처녀’로도 불린다.




남해 문학기행을 여러 해 다녔다. 10여 년 전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낸 뒤 “물미해안이 대체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덕분에 물미해안과 다랭이마을 등을 둘러보는 남해문학기행 코스가 생겼다.

물미해안은 물건리에서 미조항까지 이어지는 30리 해안길. 부드럽게 휘어진 해안선이 여인의 알몸처럼 눈부시고, 그 사이로 미풍이 매끄럽게 흐르는 곳이다.

어린 날 우리 가족은 집도 절도 없어서 금산에 있는 작은 암자에 얹혀살았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처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해 어머니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독자들과 함께 문학기행 길에 물미해안을 지나 금산 보리암에 올랐다가 금산산장 가는 길에 꽃 한 무더기를 발견했다. 보라색 꽃잎이 여섯 개의 앙증맞은 손을 펼친 모습. 높은 언덕배기나 산골짜기에 피는 얼레지였다.

얼레지 꽃말이 ‘질투’지만 남쪽에서는 ‘바람난 처녀’로도 불린다. 고개를 수그리고 피다가 완전히 개화할 땐 꽃잎을 곧추세우듯 하니 수줍은 자태 속에 은근한 도발성을 감추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저런 생각에 나도 몰래 빙긋 웃음을 짓는데, 날씬한 꽃잎 위로 젊은 날 어머니의 흰 버선코가 겹쳐 보였다. 이리 좋은 봄날 치마꼬리 팔락이며 함박웃음 짓는 얼레지 꽃잎과 반가운 꽃무리에 화들짝 놀라는 버선코의 곡선이 닮은 듯했다. 어머니 창포 머리에서 맑게 풍기던 봄내음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가신 지 벌써 칠 년이나 됐구나.’ 오늘처럼 저 길 화사하게 즈려밟고 가신 어머니…. 남겨 둔 버선코에 얼레지 꽃잎 하나 얹어드리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