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20년 아성 허물고 한국 현대바둑 첫 세대교체 이룬 기린아
"상금으로 가난한 동료에게 베풀었던…" 영원한 국수 김인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이 4일 영면하자 바둑계가 슬픔에 잠겼다.

바둑 후배들은 김인 9단을 '변치 않는 청산(靑山)'이라고 불렀다.

기품 있는 대국 태도와 중후한 기풍을 지닌 고인은 상금과 대국료로 가난한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많이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둑이 지닌 도(道)의 가치를 고수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 김인 9구단은 속기 위주로 진행하는 방송사 주최 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TV 바둑에 고집스럽게 참가하지 않았다.

"상금으로 가난한 동료에게 베풀었던…" 영원한 국수 김인
그는 위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했고, 간암으로 전이돼 최근 급속히 병세가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부터 한국기원 이사를 지낸 그는 투병 중에도 바둑 대회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중국 등 해외에서 국제 바둑대회가 열리면 늘 한국 대표 선수단의 단장으로 동행했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1943년 전남 강진 바닷가에서 태어난 김 구단은 13세 때 바둑판을 안고 야간열차로 혼자 상경했다.

원로 김봉선과 아마 고수 이학진을 사사한 그는 15세인 1958년 입단해 프로가 됐다.

19세이던 1962년 제6기 국수전에서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에게 도전했으나, 1승 1무 3패로 패했다.

국수전이 끝나고 나흘 뒤인 3월 9일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조남철 9단의 소개 편지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의 문하생이 됐다.

기타니 도장 사범 시절 그는 조치훈 9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상금으로 가난한 동료에게 베풀었던…" 영원한 국수 김인
1963년 11월, 스승 기타니의 만류에도 그는 20개월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한국기원은 "엄격하고 규율이 강한 기타니 도장 생활이 자유분방한 성격의 김인 구단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23세의 김 구단은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난공불락을 여겨졌던 조남철에게 3-1로 승리하며 국수 타이틀을 가져왔다.

한국 현대바둑 사상 첫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이후 그는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 패왕 7연패 등 국내 기전을 휩쓸었다.

하지만 1978년 13기 패왕전과 4기 기왕전에서 각각 조훈현 9단, 김희중 9단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모두 잃었다.

"상금으로 가난한 동료에게 베풀었던…" 영원한 국수 김인
고향 강진에서는 2007년부터 '김인 국수배'가 열렸다.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로 출범한 김인 국수배는 2008년 국제시니어바둑대회로 거듭났다.

2019년 10월 제13회 김인국수배를 참관한 고인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대회가 취소되자 무척 안타까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특2호실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한국기원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6일 오전 9시 1층 영결식장에서 열린다.

"상금으로 가난한 동료에게 베풀었던…" 영원한 국수 김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