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에서 20년간 자리를 지켜온 고급 일식당 ‘아오야마’가 31일 폐업한다. 삼성동에서 28년간 명맥을 이어온 일식집 ‘이즈미’, 서소문동의 40년 된 고기요리 전문점 ‘남강’도 같은 날 문을 닫는다. 30일 이 식당 관계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4년 접대비 실명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도 버텼지만 김영란법 여파가 가장 혹독하다”며 “흑자를 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안 보여 문을 닫는다”고 했다.

◆고급 음식점 잇단 폐업

서울 서소문동 고기요리 전문점 남강 정문에 31일 영업 종료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서울 서소문동 고기요리 전문점 남강 정문에 31일 영업 종료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한정식, 일식 등을 판매하는 고급 음식점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공공기관과 대기업 본사가 밀집한 지역일수록 정도가 심하다. 장기 저성장으로 소비자의 지갑이 가벼워진 데다 지난 9월28일부터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결정타를 날렸다.

청담동 아오야마의 박범순 실장(60)은 “주로 국회의원, 공무원, 의사, 기업인이 단골이었다”며 “이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매출이 40%가량 줄었다”고 말했다. 서소문동 남강의 류이상 실장(63)은 “손님의 30%는 서울시청 직원 등 공무원, 70%는 인근 기업 직원이었다”며 “김영란법 시행 이후 법인카드 사용이 크게 줄고 개인카드로 더치페이하거나 모임 구성원끼리 돌아가면서 계산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값비싼 메뉴는 잘 팔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가 아닌 일반 기업 직원마저 몸을 사려 업계의 고통은 더욱 컸다. 삼성동 이즈미의 최병망 사장(63)은 “일반 회사원도 3만원을 심리적 가이드라인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사우회’ ‘다정회’ 등의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서 모임을 열던 기업 임원들도 두세 달에 한 번으로 횟수를 줄였다.

◆바뀌는 외식 문화

고급 음식점은 불경기로 근근이 버텨오던 터였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지난해 5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등 대형 악재가 터질 때마다 요식업계는 맥을 못 췄다.

삼성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공식적으로 얘기를 못 해서 그렇지 폐업을 준비하는 음식점이 상당히 많다”며 “이달 말일부로 강남구 서초구 등지에서 대형 일식집 7~8개가 문을 닫는다”고 귀띔했다. 광화문 인근의 한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요즘 같은 때엔 권리금도 못 받고 나가야 하다 보니 매출로는 손해를 보고 있는데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을 뿐 내부적으론 무너져가는 가게가 많다”고 했다.

류이상 실장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가정은 외식비부터, 기업은 회식비부터 줄인다”며 “작년 초부터 기업 손님이 ‘회식비 한도가 줄었다’며 고기요리보다 식사메뉴를 중심으로 주문했다”고 말했다. 남강은 60년 넘게 을지로에 사옥을 두고 있던 삼성화재가 지난달 말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주력 소비자층 상당수를 잃기도 했다.

일부 고급 음식점은 이미 폐업 후 대중 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정·재계 인사의 단골집이던 수송동 한정식집 ‘유정’은 지난 7월 리모델링하고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재개장했다. 신문로2가 고급 한정식가게 ‘두마’도 같은 시기 문을 닫았다. 두마 자리엔 북한산 자락에서 영업하던 쌈밥집 ‘만석장’이 옮겨왔다.

마지혜/구은서/성수영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