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장만때 홀로 소파서 뒹굴 옛말…쿡방·먹방 영향 요리 즐기는 남성 늘어
차례상 음식 구입해 가사 부담도 줄어…"주부 스트레스 없어야 즐거운 명절"

"남편을 움직이면 명절이 즐거워진다"

주부 포털사이트 아줌마닷컴이 2014년 추석 때 내걸었던 즐거운 명절 캠페인 표어다.

올해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명절을 같이 약속하고 함께 실천하자'는 문구를 내걸었다.

'추석 먹거리는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하기' 등 5대 명절 수칙도 마련했다.

명절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남편들이 오랫동안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여겨지던 주방에 들어가 서슴없이 팔을 걷어붙인다.

아내가 음식 준비를 하는 동안 편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간 큰 남편은 그만큼 줄고 있다.

경기도여성능력개발센터가 지난해 1천48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기혼여성의 48.9%가 '온종일 음식준비를 시키고 남자들은 TV만 볼때 가장 화가 난다'고 답했을 정도로 명절에 빈둥거리는 남편은 아내들의 '공적'이었다.

핵가족화가 심화하고 평등 의식이 강해지면서 남녀 역할이 확연히 구분되던 명절 풍속도를 크게 바꿔놓고 있다.

이번 추석 연휴를 앞두고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공익 포털사이트 '위민넷'에는 남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남성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필명 '초록감성아빠'는 "우리 집은 아들 삼형제여서 '목 메달' 집안으로 불리지만, 아들 각자가 역할을 분담해 딸이 없는 집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고 전했다.

차례와 제사를 전통 방식으로 지내는 큰집이어서 명절마다 친척들이 많이 찾아오고 준비 부담도 크지만, 삼형제는 딸이나 며느리 못지않은 역할을 거뜬히 해낸다.

음식 재료 장만부터 물론 전을 부치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못 하는 게 없다.

막내아들은 먼 길을 온 형과 형수가 편히 지내다 갈 수 있도록 앞장서 앞치마를 두르는 것은 물론 커피를 타내는 센스까지 애교 만점이다.

그는 "전 부치는 일은 명절 요리 중에서도 가장 힘들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함께하면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 된다"며 "남편들이 솔선수범하니 아내들도 불편한 마음 없이 음식 장만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김모(51) 씨는 추석 연휴 내내 집에서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아직 요리솜씨가 서툴러 고기를 굽고 전을 덥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런 경향은 예비 남편인 젊은 남성일수록 더 강하다.

외지에 있는 회사를 다니는 박모(30·충북 충주시) 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번은 집에 들러 혼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밥과 밑반찬을 만들어놓고 간다.

결혼한 누나도 있지만, 아버지를 살뜰히 챙기기는 건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다.

박 씨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 남녀 역할을 구분할 수 있느냐"며 "남자도 기본적인 요리는 할 줄 알아야 한다.

결혼한 뒤에도 요리를 많이 할 생각이다"라고 했다.

남성들의 변화에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이른바 '쿡방', '먹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남성 셰프가 등장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수시로 접하면서 남성이 요리하는 것에 거부감이 크게 줄었고, 요리할 줄 아는 남자가 멋있다는 새로운 남성상도 생겨났다.

가족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대한 기대치가 예전과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

집에서는 간단한 음식만 직접 요리하고 나머지는 구입하거나, 아예 차례상을 통째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등 가사 노동을 최소화하고 가족과의 여가를 늘리는 가정도 갈수록 많아진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갤럽이 지난 8월30일∼9월1일 전국 성인 1천9명을 전화 조사한 결과, 추석이 즐겁지 않은 이유로 여성의 24%가 '가사 부담'을 꼽았다.

가사 때문에 추석이 싫다는 응답은 2001년에는 49%, 2006년 36%였다.

남성들의 요리 참여, 가사 노동 감소 등으로 여성의 가사 부담이 예전보다 훨씬 줄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혼 27년차라는 한 주부는 여성 포털 '미즈넷'에 올린 글에서 "명절만 다가오면 아직도 일주일 전부터 화장실을 못 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이번 추석에는 신랑이 시누이들 음식 시중들지 말고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욱아빠'는 위민넷에 올린 '명절을 현명하게 보내는 남편의 처세 요령'에서 "명절 준비는 온 가족이 다 같이 해야 하는데도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아직도 모든 일을 며느리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며 "부부는 결코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 쪽이 일방적인 희생을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k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