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김 추기경을 곁에서 지켜본 시람들은 한결 같이 '섬김의 정신'을 얘기한다. 딱딱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자상하게 보살핀 배려,아무리 바빠도 일일이 답장을 쓰며 마음을 어루만지는 인간적 소통,역사의 고빗길마다 흔들리지 않는 소신으로 중심을 잡아준 원칙….
[김수환 추기경 선종] 김추기경의 아름다운 힘은 '서번트 리더십'서 나왔다
이는 곧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으로 집약된다. 김 추기경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와도 직결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1998년 6월까지 1년7개월 정도 고인을 가까이 모셨던 최성우 신부(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장 · 43)는 "김 추기경의 리더십은 따뜻한 인간애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30대 초반에 김 추기경의 비서로 일했던 그는 "낯선 집에 들어와 긴장하고 어려워할까 봐 스스로 낮춰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고민을 귀담아들어 주고 아픔에 동참하려는 모습이야말로 세상을 대하는 종교인의 자세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어쩌다 언론에 추기경의 '훌륭한 모습'이 실리면 "그건 내가 아니야"라며 손사래를 쳤고 위인전을 내자는 권유도 뿌리쳤다. 이 같은 겸손의 미덕이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탄생시킨 첫번째 요소다.

김 추기경의 서번트 리더십은 남을 위한 배려와 남다른 친화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추기경이 된 뒤에도 고급 승용차가 아닌 '쏘나타'를 그대로 타고 다녔으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자녀들의 주례까지 일일이 서줬다. 주변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기 위해 대중가요를 연습하는 등 친화력도 뛰어났다. 젊은 사람들도 가사를 다 외우기 힘든 '향수'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김수희의 '애모'와 노사연의 '만남' 등도 자주 불렀다. 소년 같은 표정으로 앙코르곡까지 부르며 함께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김 추기경의 소통 방식도 따뜻하고 자상했다. 그는 영명축일을 맞는 신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줬다. 전화를 받은 신부 중에는 설마 추기경이 직접 전화를 했으랴 싶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며 전화를 끊었다가 나중에 곤혹스러워하기도 했다.

편지를 받으면 일일이 답장을 했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도 답글을 남겼다. 혜화동 주교관으로 숙소를 옮기기 전날에 교구청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아무쪼록 은총 속에 건강하기를 빈다'며 아랫사람들을 챙겼다.

원칙과 소신도 김 추기경의 리더십 요체 중 하나다. 그는 격동의 역사 현장을 지킨 한국 사회의 진정한 리더로서 불의에 맞서 끝까지 투쟁한 인물이기도 했지만,교회와 관련한 사업에서도 신중하게 결정하고 한 번 결정된 사안은 소신껏 추진하도록 지원했다. 사목행정의 투명성을 위해 서울대교구 업무 전산화를 추진할 때 설명회 자리에서 "교회에 꼭 필요한 사업인가?"를 세 번이나 물은 뒤 "그러면 반드시 잘 하라"고 격려하며 세계 최초로 교구와 본당,기관 간의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기적'을 낳게 했다.

어느 수도회의 사제서품식에서 한 신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잘못 소개했다가 아버지가 나타나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서품식이 너무 기뻐서 부활하여 오셨습니다"라며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유머와 "내게 잘하는 두 개의 언어가 있다"고 퀴즈를 냈다가 "그것은 독일어나 영어 등 외국어가 아니라 참말과 거짓말"이라는 기지를 발휘한 것도 서번트 리더십의 또다른 면모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