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 47분 단상에서...' 윤희숙 의원 '필리버스터' 최장기록
'12시간 47분'

한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이어간 시간이다. 필리버스터를 위해서다. '저는 임차인입니다'라는 제목의 본회의 5분발언으로 유명세를 탔던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11일 필리버스터를 위해 연단에 올라 장장 12시간이 넘는 연설을 했다. 대한민국 필리버스터사(史) 최장 기록이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13일 역시 10시간 2분의 연설을 해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긴 시간의 연설을 한걸까. 그전에 필리버스터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리버스터란 의회에서 다수당이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상황을 막기위해 소수당이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법이 국회를 통과해 새롭게 제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불법이 아닌 모든 수단'을 필리버스터라고 한다. 해외에서는 인간띠를 만들어 국회의장이 자리에 의장석에 가지 못하게 하거나, 투표함까지 느리게 걷는 등 기발하고도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무제한 토론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대한민국 국회법상 정당은 재적의원 3분의 1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있다. 특정 법안에 신청할 수 있는 방식이다. A라는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 A법안 찬반투표 전 무제한 토론이 가능해 지고 연설이 시작되면 '무제한'이라는 문자 그대로 연설을 무제한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 이론적으로 국회가 닫히는 시간까지 토론을 이어가면 표결없이 국회가 끝나게돼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지난 9일부터 14일 까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개정안, 국정원법 개정안, 남북관계발전법(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했다. 하지만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했다. 심지어 필리버스터랑 말이 무색하게 법안 통과를 별로 지연시키지도 못했다. 국회법에는 필리버스터의 신청 규정뿐 아니라 종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국회법은 한 정당이 무제한 토론의 종결동의서를 제출하면 24시간이 경과한 후에 투표해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는 그대로 중단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300인 중 180인 이상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를 멈출 수 있다는 뜻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에 범여권인 열린민주당, 시대전환, 기본소득당 의원들과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의원 등까지 합치면 180석이 넘는다. 마음만 먹으면 필리버스터를 종결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실제 이 힘은 결국 발휘됐다. 당초 민주당은 본래 목적이었던 공수처법 개정안을 통과 시킨후에는 야당의 권한을 존중해 필리버스터 종결권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의 이러한 입장에 국민의힘 초선의원 58명 전원이 필리버스터에 참여해 ‘필리버스터 총력투쟁’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약속은 즉시 깨졌다. 민주당은 야당권한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지 이틀만에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방역 대응을 위한 국회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며 종결동의서를 제출했다.

지난 총선 대승 후 민주당을 두고 "개헌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건 이런 이유다. 법통과를 지연시키는 최후 수단인 필리버스터 조차 무력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즉시 '여론전'에 나서겠다고 했다. 바꿔말하면 별다른 수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야당 스스로 야권의 견제가 아닌 국민적 견제가 필요하다고 호소한 셈이다.

이번 필리버스터 종결 사태를 겪으며 정치권 안팎에선 여든 야든 결국 균형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례없는 상황이 이어지며 일방독주를 어떻게 견제해야 할지 당혹스럽다는 반응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한 정치권 인사는 "법과 정책이 옳은 것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며 "그래서 그런 것들을 따질 합의와 견제가 중요한 건데, 현재는 그런 시스템이 마비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주 권한을 부여 받은 정당을 어떤 식으로 견제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