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3년 미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처형된 남로당 계열의 월북작가 임화(林和)가 북한에서 복권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가능성은 월간 문학전문지 '조선문학' 9월호가 월북시인 임학수의 행적을 소개한 기사에서 임화의 실명을 거론함으로써 제기됐다. '미제 스파이' '염세적인 반동작가' 등의 죄명으로 사형을 당한 임화의 이름이'조선문학'에 거론된 것은 경위야 어떻든 5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인 데다 이 잡지에이름이 거명된 후 복권된 작가가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민통합 차원에서 '인덕정치'와 '광폭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과거청산 및 포용의지를 천명한 대목도 임화의 복권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숙청됐다가 '조선문학'에 거명된 다음 복권된 대표적인작가는 한설야와 김철이 꼽히고 있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중심인물로 해방 이후부터 60년대 초까지 초대 `북조선문학예술가동맹'(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평화옹호위원장, 내각 문화상과 교육상 등을 지낸 한설야는 60년대 중반 김일성의 유일체계에 반기를 들다 숙청됐다. 숙청 이유는 '종파분자' 및 '부화방탕'이었고, 이후 20여년 이상 북한에서 잊힌인물이 됐으나, 80년대 후반 '조선문학'에 그의 작품이 다시 소개되면서 작가로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복권됐다. 90년대 들어서는 영화 '민족과 운명' 시리즈(카프작가편)에서 그의 생애가 재조명됐고, 그의 작품도 대부분 다시 간행됐다. 북한 최고의 현역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금년 70세의 김철은 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17세의 나이로 의용군에 입대했고, 그 이듬해인 51년 노동당에입당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작가학원에 들어가 문학 수업을 받았고, 이 무렵 '더는쓰지 못한 시'로 문단에 데뷔했다. 김철은 60년대 초반 한 여인과의 불륜 때문에 지방의 노동자로 쫓겨나 단천 연합광업기업소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그 과정에서 건강을 크게 해 쳐 한때는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방의 노동자로 쫓겨난 지 거의 20년만인지난 79년 김위원장의 '배려'로 다시 작가동맹으로 돌아와 오늘에 이르렀다. 북한문학 전문가인 김성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임화의 복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으로는 김일성 시대의 정치적 상처를 치유, 주민들의 화합을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고, 문학사적으로는 초기 북한 문단의 주축이었던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작품을 복원, 북한문학의 역사와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월북문인들의 총수격인 임화는 47년 10월 월북 후 남로당 근거지인 황해도 해주에서 초기활동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노력자' '인민의 벗' '민주조선' '인민조선'등의 선전책자를 편집,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또 이때부터 6ㆍ25 전까지 `눈이 나린다' `인민항쟁가' 등 몇 편의 시도 발표했다. 특히 "원쑤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 그 밑에 죽기를 맹서한 깃발을.."로 시작되는 '인민항쟁가'는남한 빨치산들에게 큰 인기를 모아 역시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에 의해 곡(曲)이 붙여지기도 했다.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을 따라 종군, 서울에 들어와 '조선문화총동맹' 등을 조직하는 한편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흰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피우에서' '고귀한 사람' 등의 종군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이 시들은 발표 당시 "완숙한 금자탑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간첩죄'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염전사상을 전파시키는 가증스러운 작품'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북한문학사에서도 지워져 버렸다. (서울=연합뉴스) 최척호기자 chchoi0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