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후기 조선시대로 회귀하는 건가
“공적으로 청교도, 사적으로는 변태들.” 요즘 핫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퀸의 기타주자 브라이언 메이가 미국인의 이중성을 꼬집은 말이다. 비슷한 말을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들로부터 듣는다.

“한국은 확실히 도덕지향적인 나라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울대에서 8년간 한국철학을 연구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내린 한국사회 평가다. “도덕지향성은 실제 ‘도덕적’인 게 아니라 모든 언동을 도덕으로 환원해 평가한다”는 얘기다. ‘맑고 깨끗함’이란 형용사가 소주부터 정치에까지 즐겨 사용되는 것부터 그렇다.

한국인의 ‘도덕지향성’은 조선시대 유교, 특히 성리학에 뿌리를 둔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왕도정치를 지향한 성리학이 당쟁, 위계와 차별, 사농공상, 관존민비를 고착화시킨 원천이 된 것은 역설적이다. 조선이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국가기능을 상실했음에도 350여 년을 더 존속한 배경이다.

한국통(通)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도 “과거보다 유교·도덕적 성향이 더 짙어졌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위험 감수, 성과에 대한 존경·존중 대신 기업의 잘못된 부분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얘기다. 영국 언론인 마이클 브린의 “한국인은 놀라울 정도로 동질적”이란 관찰을 보태면, 오늘날 수많은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우선 정치부터 도덕지향적이다. 같고 다름을 선악의 잣대로 삼아, 같은 편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다른 편에는 죽자사자 달려든다. 중종 12년(1517년) “자기와 뜻을 같이하면 선인이라 하고, 뜻을 같이하지 않으면 악인이라고 한다”던 실록 기록이 새삼스럽다. 훈구척신에 비해 가진 게 적은 사림파는 도덕적 우월감을 토대로 세상을 재단했다. 지금의 586 운동권을 ‘사림파의 재림’으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17세기 서양의 근대화가 한창일 때, 조선에선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놓고 죽고 죽인 20년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조정과 타협 대신 딴지와 보복만 남은 오늘날의 ‘마이너스 정치’도 다를 게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생을 팽개친 것도 똑같다. 역사저술가 조윤민은 “학자관료가 넘치던 17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공간에는 모략과 중상, 폭력의 권력초상이 선명하게 자리잡았다”고 평했다.(《두 얼굴의 조선사》)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법부는 점점 증거와 법리 위에 ‘민의’를 두는 인상이 짙다. 검찰은 먼지 날 때까지 털고, 피의 사실을 누설해 먼저 여론재판에 올리는 식이다. 법원은 파장과 피고의 ‘뉘우침’ 정도에 따라 형량을 정한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식 원님재판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상업 천시도 본질에선 큰 차이가 없다. 조선사회는 상인처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기(氣)가 탁한 놈’으로 폄하했다. 거상들조차 말년에 장사를 접고 양반이 되려 했던 이유다. 오구라 교수가 “유교에서는 도덕과 권력과 부(富)가 이상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각자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익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애덤 스미스의 위대한 발견이 성리학적 세계관에선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시장경제와 경제적 자유를 언급하면 극우로 치부될 정도다.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성공해 커지는 데 비례해 기업을 때려 이득(금전, 명성, 영향력 등)을 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작게 성공하면 조폭이 찾아오고, 크게 성공하면 정치인이 찾아온다”는 말처럼, 국정감사가 기업인을 불러다 호통치는 ‘기업감사’로 변질된 지 오래다.

조선 후기에도 변혁의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고도 모화(慕華)사상에 젖어 만동묘, 대보단을 세우는 퇴행을 거듭했다. 세계사의 가장 역동적인 시기에 북벌(北伐)이 북학(北學)으로 바뀌기까지 100여 년을 허송한 대가가 망국이다. 지금은 그 시대보다 얼마나 진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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