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통신요금 설계권까지 갖겠다는 정부
국내 통신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보편요금제 도입 논의가 본격 시작된다. 통신 3사 및 단말 제조사, 시민단체, 학계 대표 20명으로 구성된 가계통신비정책협의회는 오는 22일 열리는 5차 회의에서 보편요금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년 보편요금제 시행을 위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앞두고 추진하는 일종의 공론화 과정이다. 시장가격을 통제하는 반(反)시장주의 정책이란 비판을 받는 보편요금제를 둘러싼 논쟁이 또다시 불붙을 전망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보편요금제는 무엇일까. 보편요금제는 음성 200분, 데이터 1기가바이트(GB) 혜택을 월 2만원 요금에 주겠다는 게 핵심이다. 현재 3만원대 초반인 통신 3사의 최저요금제(음성 200분, 데이터 300메가바이트(MB)) 대비 1만원가량 싸면서 데이터 제공량은 세 배 이상 많다. 저가요금제를 사용하는 서민들이 적정 요금으로 기본(보편)적인 수준의 음성·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정부가 밝힌 정책 취지다.

과기정통부는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SK텔레콤에 보편요금제 출시를 법으로 강제할 방침이다. SK텔레콤이 월 2만원대 보편요금제를 내놓으면 경쟁사인 KT와 LG유플러스도 가입자 이탈을 막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요금제를 선보일 수밖에 없다.

보편요금제는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정책 사례를 찾기 힘든 데다 법으로 민간 기업의 서비스요금 가이드라인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가 크다는 게 시장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보편요금제의 파급력은 단순히 최저요금제 가격을 1만원가량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요금제 맨 밑단의 데이터 제공량 혜택 등을 바꾸면 어쩔 수 없이 전체 요금체계 손질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요금 설계에 개입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과기정통부는 보편요금제 실행으로 통신요금 감면액(통신사 매출 감소액)이 연간 최대 2조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같은 반시장 정책이 여론수렴 절차 없이 주문기획 상품처럼 급조됐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 6월 초 여론에 밀려 통신비 공약 1호인 통신 기본료(1만1000원) 폐지를 접었다. 국정기획위는 그 대신 기본료 폐지에 상응하는 대안 마련을 과기정통부에 닦달했고, 불과 10여 일 만에 뚝딱 등장한 게 이 보편요금제다.

치열한 고민 없이 탄생한 정책이다보니 기존 정책과의 충돌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보편요금제는 정부가 2011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알뜰폰 정책과 정면 배치된다. 40여 개 알뜰폰 사업자들은 2만원대 요금제를 주력으로 삼고 있다. 통신 3사가 2만원대 보편요금제를 출시하면 소비자들은 같은 값을 내고 알뜰폰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

시민단체들은 이제 “통신은 필수재이자 공공재”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정부는 공공연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언급하며 통신사를 압박하고 있다. 선동과 동조, 표심에 눈먼 선심성 대책, ‘코드 맞추기’식 성급한 정책 결정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방정식을 완성하는 요인이다. 포퓰리즘에 기댄 인위적인 시장가격 통제가 가져올 재앙을 감안한다면 지금 보편요금제에서 손을 떼도 늦지 않다.

이정호 IT과학부 차장 dolph@hankyung.com